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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소설 장르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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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5월16일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된 <세계인권도시 포럼>에서 열린 차인표 배우의 북토크 행사를 기사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뺄 수 있는 대목이 없을 만큼 모든 내용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1~4편에 걸쳐 나눠서 출고하겠습니다. 2편입니다.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지나간 사랑에도, 역사에도 가정법은 없다. ‘만약에’는 부질 없는 말이다. 그러나 자꾸 해보게 된다. 차인표 배우도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바로 ‘만약에’다.

 

지나간 역사에 ‘만약에’ 이야기를 지어내서라도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로 결정을 했다. 소설은 대부분의 경우 어떠한 질문에서 시작을 한다. 얼마전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차인표씨는 첫 소설을 쓰면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무거운 주제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이다. 처음 구상한 스토리는 아주 단순했다. 배우 출신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영화 같은 그런 스토리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냥 단순하게 위안부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소녀가 용감한 한국 남성에 의해서 구출되고 일본군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간다는. 어떻게 보면 할리우드식 영웅학을 생각했었다.

 

 

지난 5월16일 13시반 광주 서구에 위치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2025 세계인권도시 포럼>이 개최됐다. 차인표 배우는 포럼 세부 프로그램으로 열린 북토크 행사에 초대됐다. 차인표 배우는 2009년 출간된 소설 <잘가요 언덕>을 집필했고, 이는 12년만인 2021년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으로 재출간됐다.

 

그런데 막상 소설을 쓰기 시작하니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소설을 써본 경험이 없는 데서 오는 시행착오, 능력 부족 이런 것도 문제였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이용해서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을 뒤집어 보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미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픈 상처를 겪었는데 내가 만든 가상의 세계에서 한 여인만 구출한다고 해서 역사를 부정하면서 정신적인 승리라도 챙기는 것 이외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 스스로가 답을 할 수 없었다. 일어난 일들은 되돌릴 수가 없고 기록된 역사도 지워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다가 중간에 중단했다. 집 짓기로 치면 짓다가 말아버린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이 상처를 어떻게 싸매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덮어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차인표 배우는 소설 집필을 중단하고 연기 활동에 복귀했다. 결국 소설을 다시 쓰게 됐고 7년에 걸쳐 완성했다.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동안 훈이 할머니를 비롯 많은 위안부 희생자들께서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여전히 그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서 사과나 인정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기간 중에 부모가 되었고 또 배우로서 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한류 1세대가 되어서 외국에 진출도 하면서 내 삶을 잘 즐기면서 살았다. 그런데 2006년 그 해부터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40살이 되던 해였는데 그 해에 배우 활동을 10에서 1로 줄이고 ‘한국 컴패션’이라는 국제 어린이 구호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일을 하면서 제3세계에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를 다니면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아픔을 잠시나마 경험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전하는 일을 했다.

 

차인표 배우는 봉사활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봤고 마음 속 과제였던 소설 집필을 재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소설 집필을 재개한)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나와 내 아내가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는 점, 나는 아버지가 되었고 아내는 어머니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로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온 인류가 기억해야 할 이 가슴 아픈 위안부 사건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줘야 될 의무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고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말아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끔찍한 사건이지만 아이들에게 알기 쉽게 알려줘야 할 부모의 책임감, 어른의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식들이 태어나면 자식들에게 세상에서 먹어도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처럼 세상에서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절대로 용납되는 돼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당시 내가 소설 쓰기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어머니께서 내게 한 마디 충고를 해주셨다. 소설가에게 있어서 상상력이란 필수적이고 매우 중요한 거라고. 하지만 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상상력은 모래 위에 쌓는 성과 같다. 어머니의 이 조언은 나로 하여금 소설가에게 있어서 상상력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상상과 조작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상상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조작은 인간을 더 구속한다. 상상은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지만 조작은 인간에게 상처를 입힌다. 따라서 소설 속의 상상이더라도 반드시 진실 위에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가 내린 결론이었다.

 

역사를 다루는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고민과 책임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도리어 소설 집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외롭지만 덮어버렸던 상처를 다시 열어서 아픈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어떻게든 치유할 길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우리 후손들이 가야 할 방향이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됐다. 이후 아까 사진에서 보셨던 소설 속 순이의 고향을 찾아서 백두산을 다녀왔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살던 보호소에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자원봉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2007년 4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차인표 배우는 여느 때와 같이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날이 화창한 만큼 산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산책을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그날은 봄볕이 마당 전체에 반짝반짝거리는 아주 따스한 봄날이었다. 마당에는 꽃들이 만개했고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신선했다. 우리 할머니들 당시에 아홉분이 계셨는데 모두 예쁜 한복을 입으시고 그림처럼 한줄로 의자를 놓고 마당에 앉아 계셨다. 그날은 마침 할머니들께서 영정 사진을 찍으시던 날이었다. 한줄로 앉아 계시다가 이름이 호명되면 한분 한분씩 카메라 앞에 앉으셔서 사진을 찍으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할머니들께서 저런 식으로 한분씩 한분씩 이 세상을 떠나시겠구나. 저분들이 계시는 동안에 아무도 이 사건을 안 믿어주는데 저분들이 다 하늘나라에 가시면 과연 누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날씨가 너무나 화창했고 그리고 이미 할머니 아홉분과 다 알게 된 사이였기 때문에 이 사진 촬영 후에 할머니들께 함께 마당을 산책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단 한분도 산책을 하겠다고 나서는 분이 없었다.

 

할머니들은 왜 차인표 배우의 제안에 응할 수 없었을까?

 

다리가 아프신 분, 골반이 아프신 분,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 분, 허리가 아프신 분. 할머니들 중에서 봄날의 화창한 날씨를 즐길 수 있는 분은 단 한분도 없었다. 나는 그때 이분들은 아직도 위안부의 삶을 살고 있구나.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이후로 수십년을 사셨지만 여전히 고통 속에 사셨구나. 봄날의 날씨조차 즐기지 못하는, 아무런 기쁨이 없는 삶을 평생 동안 살고 계셨구나라고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오랜 기간 위안부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고정관념을 제공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날 비로소 처음으로 위안부 사건을 나의 시선이 아닌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사물의 모양이 달라 보이듯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정하자 그간 가해자들에게만 분노하느라 바빴던 무심했던 것이 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할머니들의 아파하는 마음이었다.

 

가해자들에 대한 분개를 넘어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 두 가지가 함께 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자에 머물러 후자를 외면할 위험이 있다.

 

너무나 아파서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아무것도 기쁘지 않은 삶을 수십년 동안 살아온 할머니들의 고통. 고대 이집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마음이 가벼운 자는 죽어서 하늘까지 날아가지만 무거운 자는 날아갈 수가 없다.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한 마디 미안합니다. 이 사과 한 마디였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사과를 듣고 싶은 이유는 지금 와서 그들을 혼내거나 타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일이 용서할 수 있는 일이거나 용서해도 되는 일이어서가 아니라 오직 용서만이 그 아픔과 고통의 감옥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위안부 범죄를 겪은 할머니들의 아픈 마음 그리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들, 다음 세대를 사는 우리들의 상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받기를 바라며 이 글을 다시 쓰기로 결정했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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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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