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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밑바닥 청년 정치에 도전했던 성보빈씨 “정치뽕 안 맞았지만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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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1991년생 흙수저 출신 청년 정치인. 성보빈씨는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보빈씨는 “힘없는 자들의 희망의 증거이자 약자 대변인”이라는 슬로건으로 정치권에서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청년 정치판에서 쓴맛을 봤다. 두 차례 기초의원 선거(2018년과 2020년 부산 사하구의회)에 도전했지만 정당 공천을 못 받았다. 보수정당에서 좌절과 시련을 겪은 뒤 반드시 정치의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만 간다.

 

평범한미디어는 지난 4월26일 저녁 부산 중구에 위치한 모 호텔 라운지에서 보빈씨를 만났다. 일단 보빈씨의 정치 여정이 워낙 파란만장하기 때문에 기사 스크롤이 좀 길다.

 

이날 직장 퇴근 후 대학원 수업까지 들어야 하는 보빈씨의 꽉 채워진 스케줄로 인해 늦은 시각에 인터뷰가 시작됐다. 막상 하고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났고 밤 늦게 끝이 났다.

 

 

보빈씨는 “(정치인 외에 법조인·언론인·시민운동가 등) 여러 분야의 길을 다 열어두고 있다. 그 당시에는 정치를 중점적으로 봤던 것 같다. 여러 루트들과 직업군이 있는데 솔직히 기자 생활도 조금 해보긴 해봤다”며 “나도 대변인 할 때 글을 써봐서 글쓰기를 좋아한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기자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법조인도 로스쿨까진 아니더라도 법무사 관련 자격증도 준비를 했었다. 시민단체 활동도 최근까지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후원을 했었고 과거 총회에도 몇 번 참석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 활동을 좀 더 중점적으로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언론이든 법조인이든 시민사회든 정치든 기회가 오는대로 다 잡을 것”이라며 “정치에 미쳐서 무조건적으로 가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건 정치뽕 맞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자기 가치관을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과거에는 정치를 선택했지만 앞으로도 정치일 필요는 없다.

 

보빈씨는 법조인·언론인·시민운동가 등 세 가지 모두 “성격이 다 나랑 잘 맞는다. 현장, 사람, 설득, 공감능력 나아가 자기가 발로 뛰지 않으면 돈을 못 버는 직업군이다. 셋 다 너무 나랑 잘 맞는다”며 “솔직히 어디에서라도 나에게 기회가 오고 여건만 되면 바로 잡을 것이고 염두에 두고 있다. (일반 직장인과 달리) 셋 다 공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고민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번 4.7 보궐선거 정국에서 보빈씨는 수 차례 캠프 합류 제안들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응하지 않았다.

 

보빈씨는 “(한 번 정치권에 발을 들이고 선거에 출마하면 못 빠져나오는데 그걸) 정치뽕이라고 하는데 나는 뽕은 안 맞았으니까 (선거에서 실패하고) 바로 회사를 구하고 했다. 뽕 맞았으면 지금도 일 안 하고 4.7 보궐선거 캠프에 진작 들어갔을 것”이라며 “솔직히 모든 후보 캠프에서 다 연락이 왔다. 근데 안 갔다. 왜냐면 직장 그만두고 관둘 정도는 아니었고 그만큼 정치뽕을 맞지 않았다”고 피력했다.

 

사실 보빈씨는 작년부터 실력을 쌓기 위한 ‘정치활동 안식년’ 기간을 보내고 있다. 직접적인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그 기간에 직장생활과 더불어 대학원 석사 과정과 여러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슴 속 한켠에 정치에 대한 미련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보빈씨는 “언젠가는 (다시 정치 도전을) 할 것 같긴 하다. 솔직히 언젠가는 죽기 전에 한 번 (선출직 정치인을) 해보고 싶다. 그건 사실이다. 나도 솔직히 이때까지 투자한 게 있다”며 “6년간 정당생활을 하며 취업시장 포기했지, 20대 여성으로서 청춘 다 버렸지, 거기에 다 몰빵했다. 당비도 5만원씩 내고 당의 재정에 기여하려고 알바해서 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학교 수업 결석해가면서 정당활동을 했다”고 풀어냈다.

 

이어 “투입한 것들이 많다. 돈 뿐만이 아니라 체력과 시간. 그게 아까워서라도 한 번은 해보고 싶다. 죽고싶을 정도로 아깝고 스스로 한심하다. 정말 정치적으로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다시 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과거의 정치활동을 들여다볼 차례다. 핵심 키워드 몇 가지를 꼽아보면 △가난 △보수 △홍준표 등이다.

 

보빈씨는 우스갯소리로 스스로의 삶에 대해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면서 “자살 안 한 게 대단할 정도다. 종교에 빠져 의지한다든지 아니면 아주 나쁜 길 불법적인 길로 빠진다든지 그렇게 엇나가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자평했다.

 

보빈씨의 가난했던 스토리는 눈물겹다. 고시텔에서 4년간 거주하며 잘 씻지도 못 할 정도로 알바에 치여살았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신문배달도 했고, 교통비 아끼려고 5킬로미터 이상 터널을 걸어다니기도 했고, 생라면을 챙겨다니며 화장실에서 몰래 먹고, 알바할 때 손님이 남긴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등 파란만장했다.

 

보빈씨가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지독했던 가난이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대학에서 총학생회와 갈등을 빚고, 국회사무처 소관 사단법인에서 활동하게 되는 등 직접적인 정치 입문 계기는 따로 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비참한 삶의 근원을 생각하게 됐다.

 

보빈씨는 “(정말 가난하지만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순응하느냐 극복하느냐의 이 차이가 크다. 이 둘 중 선택을 하는 것인데 꼭 극복했으면 좋겠다”면서 “내가 약자였다가 권력을 가지면 강자가 된다? 변한다? 나는 약자를 위한 정치를 계속 할 수 있다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김밥 한줄로 끼니를 떼우던 사람이 갑자기 랍스터 먹는 환경이 됐다고 그렇게 될까? 그렇지 않다. 거지 근성은 그대로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보빈씨는 어려웠던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누구보다 부모님을 존경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보빈씨는 “예전에 다 망한 선거였지만 사하구의원에 나가 당선되면 월급 300만원 정도 받는다. 만약 되면 아빠 마티즈 사주는 게 꿈이었다. 경차라도 300만원으로는 못 사지만 소득이 보장됐기 때문에 대출받아 살 수 있다”며 “60대라면 보통 자기 집 하나는 있는데 우리 부모님은 그렇지 않다. 그런 분들이 그대로 죽어야 하느냐? 사지 멀쩡하고 아이큐 세자릿수 되는 자식이 있으니 내가 해줘야 할 책무이자 부모님에게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부모와 자식의 삶은 별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나의 외관적인 모습부터 내 성격과 기질을 다 물려주셨다. 부유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악바리 근성 죽지 않고 견디는 그걸 준 것 같다. 나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엄마 아빠 사진이 내 방 천장에 붙어 있다. 내 차에도 있다. 그 정도로 내 삶에 큰 의미다. 효심이라기 보다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친동생이 배를 돌리고 있는 뱃사공이랄까. 엄마 아빠 두 분이 안 빠져 죽도록 지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풀어냈다.

 

“마인드라고 해야 하나? 가난하고 돈 없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마음가짐을 가르쳐주셨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내가 돈 없어서 대학 졸업하기 힘들고 신문배달하고 정치하기 힘들고 이러니까 너무 가슴 아파하셨다. 딸은 이만큼 역량이 되고 말도 잘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데 부모가 돈을 못 대주니까 너무 가슴치며 아파하셨다. 근데 나는 정치 못 하고 공천 못 받아도 내가 돈 벌어서 10년 뒤에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왜 가난한 청년이 굳이 보수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걸까?

 

보빈씨는 스스로 묘사하기를 대학생 시절 “극좌였고 마르크스 책을 끼고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보수정당에 투신했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다.

 

보빈씨는 “(진보를 자처하는 대학생 선후배들이) 뒤에서는 집회시위에 나가자고 부추겨놓고 막상 현장에 나가보면 학점상 불이익이 두려워 안 나왔더라. 자기 취업할 때 불이익 될 것을 미리 계산해서 자기가 생각했던 정의감이나 그런 목소리를 못 낸다. 한 마디로 찌질한 것”이라며 “실제 (집회시위 현장에) 나간 사람은 나랑 몇 명 밖에 없다. 징계먹을 것을 알고 나갔다”고 전했다.

 

이어 “그 당시 민주당이나 진보 정치인들이 맨날 돈없는 사회적 약자 계층을 위한다고 하고 입으로는 열 번 말하는데 행동은 한 번 밖에 안 한다”며 “이렇게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위선적인 사람들이 진보라는 게 정말 싫었다. 환멸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자신이 직접 목격한 진보의 위선으로 인해 보수정당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즈음 보빈씨는 은행권 취업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5년 국회사무처 소관 사단법인이 기획한 '제1회 부산지역 대학생 리더십 아카데미'가 처음으로 열렸다. 보빈씨는 창단 멤버로 활동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청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렇게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정당 활동을 하다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보궐선거에서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공천을 못 받았다.

 

보빈씨는 “(선거 실패는) 너무 아픈 것이라서 상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 “공천을 못 받았다. 사실 탈당한지 좀 됐다. 일단 상처가 크다. 남들은 내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나도 내가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50% 정도다. 나의 아킬레스건도 있다. 근데 그런 취약점이 있어도 정치인으로 잘 된 사람들도 세상에 존재한다”고 운을 뗐다.

 

 

보빈씨의 아킬레스건은 음주운전 문제다. 이는 기사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보빈씨의 선거 실패담을 좀 더 들어보면 일종의 “빽”이 없으면 공천조차 받기 어렵다는 현실의 벽을 체감했다는 것이다.

 

보빈씨는 “당(지역구 당협위원회)에서 말한 핑계 중에 하나가 당장 선거 치를 경제적 넉넉함이 없다고 했다. 내가 이걸 녹음했어야 했는데 대놓고 돈 없어서 공천 못 주겠다는 말이다. 내가 그날 그 말 듣고 울고불고 한다고 녹취를 못 했다”며 “실제로 지금 이 바닥에서 기초의원들 중에 정당생활을 하지 않았어서 누구지? 이런 경우가 많다. 정당활동을 했다면 다 알 수 있는데 생전 처음 본 사례들이 있다. 그냥 갑자기 구의원 공천을 받았다면 거의 대부분 부모의 배경 등 뭔가가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 정도의 인지도나 조직력이 있으니 (기초의회 후보 공천권을 갖고 있는) 당협위원장과 거래를 할 수 있다. 나는 안 나갈 것이니 내 자식에게 주라. 이렇게 할 수 있는 거고”라며 “보통 누군가의 아들 거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 같다. 전국의 2030 구의원들 전수조사까지 안 해봤지만 면면을 보면 일단 대부분 집이 잘 산다. 나처럼 맨땅에 헤딩하는 줄 없고 돈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강변했다.

 

이 대목은 어디까지나 보빈씨의 주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이런 비슷한 체험담은 아주 흔하다. 단순히 개인의 한풀이로 치부할 게 아니라 좀 더 투명한 공천 절차가 확립될 필요가 있다.

 

보빈씨는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그 스토리를 내가 당선되면서 확 파도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SNS 보고 있다가 저런 사람도 정치하는데 큰 실수를 했고 돈도 없는 저런 사람도 되는데 나도 하고 싶다. 그랬으면 좋겠고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빈씨는 앞서 서술했듯이 정치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원 오브 뎀으로 정치적 기회가 생긴다면 적극적으로 잡을 생각이다. 국회의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본인이 살고 있는 사하구에서 구의원으로 당선된 뒤에 최대치로는 사하구청장을 해보는 것이 목표다.

 

 

사실 그동안 보수정당 내부에서도 “부자정당” 이미지를 탈피해서 사회적 약자와 서민을 챙기는 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들은 꾸준히 제기됐었다.

 

보빈씨는 “그나마 국민의힘이 이제 약자와의동행위원회 이런 걸 만들었는데 서서히 그런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며 “개인적으로 김미애 의원님과 같은 정치인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의원님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방직공장 노동자로 어렵게 살아왔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몸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정치인들이 많이 나와야 보수정당의 이미지 변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김 의원은 2018년 김세연 전 의원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아 자유한국당에 들어오게 됐고 작년 20대 총선(부산 해운대을)에서 국민의 부름을 받았다.

 

김 의원은 당선 소감으로 “입양(미혼 싱글맘으로 세 자녀 양육), 여성 인권, 장애인 문제 해결을 위해 발로 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동안 보빈씨는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현직 5선 의원)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실 그런 발언을 많이 해서 욕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보빈씨가 볼 때 역경을 딛고 일어선 스토리의 끝판왕이기 때문에 홍 전 대표를 좋아한다고 한다.

 

보빈씨는 “다른 정치인들의 그런 역경을 딛고 일어난 스토리를 자세히 접할 기회가 없었다. 홍 전 대표는 대통령 후보로 나갔으니 전국민이 흙수저였다는 걸 알고 있다. 나도 2017년 대선 때 들여다봐서 잘 알게 됐다”며 “삶의 궤적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작년 총선 대구에서 보빈아 왔나! 이렇게 불러주셨다”고 밝혔다.

 

“(홍 전 대표의 단점도 인식하고 있는가?) 당연하다. 말이 참 거칠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무감각이 있고, 특유의 정치 촉이 있다.”

 

공식 인터뷰를 마치고 마무리 인사를 하던 중에 보빈씨는 홍 전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려줬다. 녹음을 하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홍 전 대표가 당대표급 인사임에도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했고 무엇보다 그녀의 흠을 물고 늘어지는 다른 사람들의 뒷담화에 대해 “공직자 중에 그 정도 흠 없는 사람이 어딨느냐”는 식으로 옹호를 해줬다고 한다.

 

 

그동안 평범한미디어는 음주운전 문제를 집중 보도해왔고 음주운전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제도 개선을 도모해왔다. 보빈씨는 음주운전 전력이 있다. 사실 개그맨 황기순씨도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켰다가 세월이 일정 정도 흐른 뒤 ‘도박중독 치료 및 강연’을 해오면서 대중들에게 양해를 받은 바 있다. 보빈씨는 2019년부터 ‘윤창호법 연계 음주운전 근절 캠페인’ 활동을 하고 있다.

 

보빈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주운전 전력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은 처음인데 “음주운전 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괴롭고 죽고싶을 만큼 죄송스럽다”며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다. 환생해서 그런 오점을 안 만들고 싶다”고 운을 뗐다.

 

이어 “故 윤창호 그분의 목숨을 가져가는 대신 내 목숨을 가져갔으면 싶었다. 윤창호 그분이 훨씬 더 나보다 사회에 기여를 많이 할 것이고 만약 그럴리 없지만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그리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다”며 “나는 정치하기 위해서 그게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에서 아킬레스건이다. 내가 정말 술을 좋아하는데 그때(2015년)는 음주운전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 했었다”고 밝혔다.

 

 

음주운전 전력을 감추려고 했지만 결국 선거 도전 이후로 알려지게 됐다.

 

보빈씨는 “감추고 싶었지만 선거 때문에 다 알게 됐다. 친구들도 놀래서 한숨 쉬고 엄마도 너무 실망을 하더라”며 “이미 다 까발려진 이상 내가 차 안에 항상 5만원짜리 네 장 총 20만원을 넣어놓고 다닌다. 아직도 음주운전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술자리가 끝나고 차를 가지고 온 사람이 있다면 5만원을 주고 직접 대리운전을 불러준다. 그렇게 내 돈 써가면서 소소하게 내 잘못을 반성해가고 있다”고 어필했다.

 

이어 “(윤창호 친구들과) 2년 전에 처음 연락했었다. 얼마 안 되지만 17만5000원 정도 캠페인을 하는 데에 보탬이 되려고 후원했다. 물론 물질적인 것 외에 나도 그 행사에 나가고 싶었다. 뱃지와 내 차 스티커 등도 구입했다”며 “내가 개인적으로 사비를 들여 음주운전 근절 캠페인을 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렇게라도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것 말고 음주운전으로 피해를 보고 병상에 있는 분들 찾아다녔다. 인천 음주운전 피해자 (네이버) 밴드가 있어서 우연히 봤는데 다시 들어가봤더니 사라졌다. 피해자들 중에 병원비가 급한 분이 있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거듭해서 보빈씨는 “내가 음주운전으로 인명 사고를 낸 것은 아니지만 음주운전자들이 나처럼 반성하고 살아갔으면 좋겠고 그런 의미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한 마디를 해달라고 하자 보빈씨는 “내가 음주운전 아니라도 악플이 많다. 정말 많다. 보수정당이라서 많은 것 같다. 직설 화법을 써서 그런 것도 있고 나름 자극적인 멘트를 좀 하니까 그런 것 같다”며 “그런 악플러들 이제 고소할 거니까. 내가 그때는 고소할 돈이 없어서 안 했는데 지금은 송달료 20만원 내서라도 할 것이다. 우리 할머니 욕한 것도 있다. 대출받아서라도 그 사람 고소하고 싶다”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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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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