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2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비엔나의 여름. 그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유명한 축제 <필름 페스티벌>이 있다. 7~8월 내내 시청 광장에 전세계 음식들을 판매하는 수십개의 부스가 있고, 커다란 야외 스크린에 영화를 상영하거나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오케스트라가 영화 음악을 연주한다. 그날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로 더 붐볐다. 영국 피쉬앤칩스, 중국 만두, 태국 팟타이, 한국 핫도그, 일본 라멘 등등... 음식 부스를 차례대로 지나칠 때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핫플의 기운을 즐기며 신중하게 축제에서 즐길 마지막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내 앞으로 천천히 한 할머니가 지나갔다. 이런 축제 한복판에 보행보조기를 잡고 비틀거리는 할머니의 등장이라니. 선명한 초록색 드레스와 귀에 딱 붙는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이색적이었다. 기존에 익숙했던 할머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부조화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천천히 내 앞의 음식 부스로 가서 음식을 구매하고, 다시 천천히 보행보조기를 움직여 음식을 담는 곳으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바라볼 뿐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음식을 받을 땐 혹시 떨어뜨리진 않을까 더 숨을 죽였다. 음식을 건넨 직원이 잠시 그릇을 같이 잡아주자 마침내 그녀는 무사히 보행기 의자에 음식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음식을 먹는 테이블 공간으로 멀어져갔다.
왜 혼자 온 걸까? 왜 아무도 나서서 그녀를 부축하거나 음식을 대신 옮겨주지 않았을까?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머릿 속에서 질문들이 맴돌았다. 그녀와 똑같은 태국식 치킨 볶음밥을 주문해 먹으며 함께 온 오스트리아 친구에게 물었다. 왜 사람들이 그녀를 돕지 않았냐고. 대답은 이랬다. 그녀는 혼자 해냈고 사람들은 그녀가 도움이 필요할까봐 계속 지켜봤다고.
약자를 돕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걸까? 약자를 돕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좋은 일이다. 약자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보다 팔을 잡아 부축하거나 음식을 대신 가져다주는 건 분명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그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기회를 뺏는 거라면? 그녀는 나처럼 먹고 싶은 음식을 스스로 주문하고 옮길 수 있었다. 보행보조기와 함께 느린 움직임으로 다른 방식이 필요했을 뿐. 이날 핫플레이스에서 혼자 볶음밥을 주문해 먹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녀는 또 다른 도전을 꿈꾸는 중일지도 모른다.
“노인은 못 해!”라는 짐작과 걱정이 그들을 정말로 못 하게 만든다는 건 이미 유명한 심리학 실험(시계 거꾸로 돌리기 실험 Counter clockwise study)으로 증명된 바 있다. 이 실험은 70대 노인들을 모아 20년 전 일상이 재현된 공간에서 과거의 상황을 현재로 인식하도록 해서 일주일을 함께 살게 했다. 가족과 간병인이 대신 해줬던 모든 일들을 직접 해야 했다. 요리를 하고 짐도 직접 옮겼다. 일주일 뒤 그들의 시력, 청력, 기억력, 인지능력 등이 모두 향상되었고 제3자가 알아볼 정도로 외모 또한 매우 젊어졌다.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하며 그들은 더 젊어지고, 건강해졌으며, 행복해졌다.
그동안 내게 노인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그들을 보고 자리를 비켜주는 것을 넘어 그들의 자리는 다른 색깔로 구분하고 다른 자리와 떨어뜨려 놓았다. 노인은 거기에 앉는 존재였다. 약자석에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렇게 세상은 나뉘어져 있었다. 물론 비엔나의 대중교통에도 출입문 옆 좌석엔 약자석 스티커가 붙어있다. 하지만 그 자리는 노인만의 자리가 아니다. 모두가 앉을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한 이가 보이면 의사를 물어본 후 자리를 양보한다. 그래서 노인은 늘 앉아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약자석을 넘어 어디든 존재한다.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의 세상과, 느리고 늙은 사람들의 세상으로 나누는 건 편리하다. 도움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후자를 지워버리는 거니까. 누구나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은 조금 불편하고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보행로의 턱을 없애고, 엘레베이터를 설치하고, 느린 사람들을 기다려주어야 하니까. 하지만 고를 수 있다면 나는 후자의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도 느려지고 다리가 불편해질지 모른다는 이기적인 이유에서다. 백발이 되어서도 혼자 축제를 즐기러 갈 계획을 세우며 설레고 싶다. 지금처럼 진주 귀걸이를 하고 휠체어를 움직이며 음식 부스를 구경하고 싶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이 기분을 그때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