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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다이 인생⑤] 조대원의 소신 정치 “아닌 것은 아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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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한 번 해보겠다고 권력에 고개 숙일 수 없어
내 소신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정치를 출세의 도구로 보는 뿌리깊은 사고방식. 조대원 전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경기 고양정)은 그런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독고다이 인생 다섯 번째 주인공은 조 전 위원장(고양시 정)이다. 그야말로 독고다이 인생의 기획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기간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한 조 전 위원장은 비록 당원들의 선택을 받지 못 했지만 면전에서 "친박 8적 퇴출"을 외치는 등 소신 행보로 주목을 받았다. 

 

 

작년 12월9일 본지 기자는 조 전 위원장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짧은 시간 동안에도 조 전 위원장의 신념과 소신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말이 많고 길었지만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터였다.

 

조 전 위원장은 2005년 한나라당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당적을 유지하고 있다. 당심과 현실 보단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신의 소신이 항상 우선이었던 17년간의 정치 활동. 한 마디로 조 전 위원장은 스스로 생각해봤을 때 "아니라면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를 지향했다. 필요하다면 소속 정당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그의 정치 행보는 몸에 좋지만 입에 쓴 보약과도 같았다.

 

조 전 위원장과 전화 인터뷰를 했던 시점은 지난 3월4일이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 각종 정치 평론 관련 인터뷰 문의로 매우 바쁠 때였다. 그래서 따로 약속을 잡기 어려웠다. 

 

 

조 전 위원장을 만난지 거의 3개월이 넘었다. 우선 반가운 마음에 근황부터 물었다.

 

조 전 위원장은 “현재 백수다. 특별히 하고 있는 일은 없다”면서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느냐고 많이 물어본다고 말했다.

 

아내가 미국에서 화학박사를 하고 회사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게 되면서 집안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 태권도장 관장을 하고 있는 동생이 가끔 나를 도와준다.

 

표면상 백수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조 전 위원장은 정치 관련 활동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공통 질문을 해야 한다. 공천조차 쉽지 않은 원외 정치인의 삶. 무엇이 가장 힘들었을까?

 

아무래도 불안감이다. 내일은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를 때 미래가 불투명하고 내가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을 얼마나 왔는지 또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되는지 과정도 모르고 결과도 전혀 알 수 없다. 이 점이 가장 힘들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과정 그런 경험들은 다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변호사나 다른 전문직, 사업체가 있더라도 일단 정치에 발을 들이면 생계로 하고 있었던 직업보다 정치가 우선순위가 된다. 그래서 도리어 생계로 하는 일들이 관심권에서 멀어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나하고 비슷한 고민을 하며 비슷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조 전 위원장은 지금도 꿈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도 많다. 버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현실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것부터 말하자면 내 주변에 있는 분들이 날 기대하고 신뢰하고 사랑해주는 마음 그게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비효율적인 정치 경로일 수 있지만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신뢰기반 만큼은 탄탄하다. 조 전 위원장은 당내 비주류다. 공천장을 받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고 항상 당권자가 불편해할지라도 쓴소리를 내놓는다.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겪는 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는 당내 비주류다. 당에서도 맨날 나가라고 한다. 공천은 떨어지는 것이 일상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다. 공천만 18년 동안 여섯 번이나 떨어졌다. 내가 해온 경력이나 공부해온 거 따져보면 공천 한 번 줄 때도 되었는데 그렇다. 게다가 텃밭인 경상도로 공천을 달라고도 안 했다. 경상도 공천 신청은 딱 한 번 하고 나머지는 다 수도권으로 했다. 그래도 안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을 떠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나를 미워하는 분들보다는 가까이서 나를 사랑해 주고 응원해주는 분들이 훨씬 많다. 내가 아직까지 국회의원 한 번 못 해봤지만 이 사회에서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서 열심히 해보고 싶다. 국민들께서 나에게 부여한 영향력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 상식에 기반한 그의 거침없는 소신 발언. 예를 들면 2019년 초 불거진 '5.18 망언' 사태 당시 조 전 위원장은 아래와 같이 판단했다.

 

과거에 5.18 관련 망언을 우리당 일부 사람들이 했었다. 나는 여기에 대해 당연히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는 묵살당했다. 오히려 왜 사과해야 되냐면서 세미나까지 열었었다. 심지어는 나가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에 우리 당 사람들이 5.18 묘역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앞서가기 때문에 선각자로써 박해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항상 사명감을 느끼며 보람과 재미까지 느낀다. 이런 감정(뿌듯함)이 없었다면 정치를 포기하거나 당을 나갔을 것이다.

 

선출직 당선은 커녕 공천도 어려운 현실이다. 당직마저 당협을 맡았던 것 외에는 전무하다. 이런 조 전 위원장에게도 '인생의 전성기'가 있다. 바로 "당협위원장에 임명되었을 때"인데 그때가 가장 성취감이 컸다.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내가 정치 인생 18년 중에 제일 기뻤던 순간은 일산 서구에서 9대 1이라는 전국 최고 경쟁률을 뚫고 당협위원장이 된 것이다. 심지어 현역 국회의원, 당대표 측근 이런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겼다. 정말 다른 거 다 제외하고 면접 점수만으로 선발되었다. 그 소식을 들을 때는 운전 중이었는데 너무 벅찬 기분이 들어 휴게소에 들어가 차를 세운 후 펑펑 울었다. 왜냐하면 나는 한 번도 당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너무 기뻤다.

 

 

앞서 언급했던 2019년 전당대회는 조 전 위원장의 정치 인생 제2의 전성기와도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용기에 박수를 쳤다. 김무성 대표의 격려 전화를 받았던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때는 잘 몰랐고 얼떨떨했다. 그걸 계획 하에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이들의 작태에 너무 화가 났다. 정말 국민 보기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 칼을 들고 위협을 하는 사람과 격투해서 사람을 구해낸 적이 있을 정도로 불의를 잘 못 참는다. 군대에서도 중대장이 후임 병사를 구타하는 것을 막다가 대신 맞았다. 김진태 의원을 비판한 것도 정치적 계산이 전혀 아니다. 그냥 내가 보기에 아닌 것 같아서 폭발한 거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기자들에게 연락이 오고 왜 내가 TV에 나오는지 의아했다. 이때도 내 인생에서 인상 깊었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굳이 전성기를 뽑자면 역시 당협위원장이 되었을 때다.

 

당대표 후보로 나선 김진태 전 의원이 면전에 있었음에도 그의 거침없는 저격 발언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야말로 조 전 위원장은 ‘노빠꾸’ 기질을 타고났다. 당협위원장이 된 과정을 조금만 더 살펴보자.

 

당대표까지 했고 4선 중진이었던 중진이 다른 사람을 밀어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되었다. 줄 하나 대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오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때 당시 당대표가 홍준표 대표였다. 당시 홍문표 사무총장이 해당 지역은 당대표가 결심해서 자기 측근 다 배제하고 현역 의원 유무 다 배제하고 면접 점수만 가지고 평가했다고 이야기했다. 시기적으로 당이 어려울 때였지만 홍준표 의원이 강직한 면이 있어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운도 나름 따랐고 심사위원의 절반 이상이 외부 인사인 교수들이 많아서 될 수 있었던 거 같다.

 

 

이렇게 강직한 성격의 조 전 위원장도 사람이다.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무엇을 하며 이겨내는지 질문했다. 조 전 위원장은 일단 그런 감정들을 이번 대선에서 가장 많이 느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지난 총선에서도 잘못하면 100석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자 당 내부에서는 나 보고 내부 총질한다고 했다. 심지어는 빨갱이 소리까지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육사를 나온 군인 출신이고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용사다. 이런 사람을 보고 빨갱이라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그렇게 이념적으로 투철하신 분들이 군대는 왜 안 갔다 왔는가? 어쨌든 그렇게 공격할 때 외로운 감정을 많이 느꼈다.

 

역시 여행 만큼 좋은 것이 없다. 조 전 위원장에게 여행은 그냥 단순한 취미활동이 아니었다. 전국에 있는 지지자들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민심을 탐방하는 목적도 있다. 이동시간에 사색에 잠기는 것도 조대원표 소신 정치의 원동력이다.

 

나는 주로 힘들 때 여행을 많이 한다. 내가 정말로 감정 절제가 되지 않을 때 전국을 돌면서 날 아끼고 격려해준 분들을 만나면 정말 힘이 난다. 특히 지방에 있는 분들은 만날 기회가 많이 없기 때문에 여행하면서 많이 만나려 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풀어야 하는 것 같다.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철도를 이용하면서 혼자 사색하는 시간도 가진다. 이 지역 저 지역을 돌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으며 최대한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려 한다.

 

 

궁극적인 꿈이나 목표 같은 게 있을 것이다. 일종의 지향점이다. 조대원표 소신 정치를 가능케 하는 "등대"로 작용할 것이다. 조 전 위원장은 좋은 정치를 펼치는 대통령이나 단체장을 꿈꾸고 있다. 그런 의사를 내비쳤다.

 

아직 국회의원도 못 해봤지만 국가 경영에 대한 꿈이 있다. 그래서 국민들이 정치를 바라볼 때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정치를 국민 앞에 펼쳐보이고 싶다. 그동안의 정치는 국민들을 낙심하게 했다. 그러나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군대를 예로 들자면 예전에는 부조리가 정말 심했다. 지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보다는 그래도 나아졌다. 예전 사회와 지금의 사회는 분명 다르다. 내가 18년 전에 처음 당에 들어왔을 때는 공천을 받기 위해 돈을 내야 했고 줄을 서야 했다. 그게 당연시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명목상으로 그런 것들이 많이 배제되었다. 그래도 이젠 정치가 국민 눈치를 본다. 내가 있는 동안은 그래도 국민들이 피부로 와닿을 정도의 통합과 화해, 상생의 정치 그리고 국민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그런 정치를 하고 싶다.

 

사실 정말 솔직히. 끝까지 정치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치를 하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

 

그거는 잘 모르겠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나도 한 집안의 가장인 이상 집안의 수입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임하고 있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게 때문에) 더더욱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또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말 한 마디라도 더 남기려 한다. 나는 국회의원 한 번 해보겠다고 권력에 고개 숙이며 내 소신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40년 동안 이어온 과정의 시간과 노력을 바꾸고 싶지 않다. 만약 내 소신을 어긴다면 나 뿐만 아니라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도 너무 미안할 것 같다.

 

조 전 위원장은 이상적인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 정치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안할수록 쪼그라들지 말고 할 말을 하는 것이 조 전 위원장의 지론이다.

 

 

지난 1월 즈음 조 전 위원장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 교체설을 주장하는 보도자료 성격의 공지 문자를 돌렸다. 아무리 대선 승리가 중요하더라도, 당에서 성장한 내공 깊은 정치인들이 배제되고 외부 인사가 대통령 후보를 거머쥐는 것 자체가 문제적이다. 조 전 위원장은 그렇게 봤다. 그래서 유승민·홍준표 단일화설을 밀었다. 그러나 결국 윤석열 후보는 경선을 넘어 대권까지 움켜쥐었다. 인터뷰 당시에는 아직 대선 투표 전이라 윤석열 당선인에 대한 평가를 묻지 못 했다. 어찌됐든 조 전 위원장의 바람대로 되지 못 했는데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결국 현실적인 대안이 없어 윤 후보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 정치권 정당의 눈높이가 국민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 했다. 또 사회의 발전, 변화 속도를 정당이 따라가지 못 했다. 대안 자체가 없었다는 게 표면적이지만 당에서는 대안을 만들려고 생각도 안 했다. 나는 일단 비대위 체제로 가면서 홍준표와 유승민 2명이 단판 승부를 낸 다음, 승자가 대선 후보가 되고 패자가 비대위원장이 돼서 당을 수습하는 동시에 대선을 치르자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묵살당했다.

 

 

조 전 위원장은 아무리 윤 당선인이 경선에서 이겼다고 해도 1월 시점에서 봤을 때 갈수록 윤 당선인의 지지율이 이재명 후보에 비해 떨어지고 있던 위기였던지라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던 거다. 그러나 당시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은 선대위 조직을 해체시켰다. 당 입장에서도 후보를 교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 말이 맞다. 당 입장에서는 번거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하려고 하면 왜 못 하겠는가? 예전 2008년 FTA 광우병 논란 당시에 우리 국민들이 시위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면 결국 미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다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서 좀 더 합리적인 협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국민들이 반대한다는 명분을 들어 협정 내용을 좀 더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후보의 봉합을 이끌어내는 데 내가 기여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둘 다 나가라고 비판하니까 그 둘이 정신 차리고 극적으로 화해를 했다. 당내에서 비판과 대안 제시도 못 한다면 그거는 군대보다 더 못 한 집단이다.

 

 

조 전 위원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출신이다. 특별히 군인이라는 직업을 택한 계기가 있을까? 왠지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군대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 같은 그런 이미지다. 그러나 의외로 재미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주변에서도 밝힌 내용이고 유튜브에서도 밝힌 내용인데 사실 군인 되려고 육사를 간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 당시 시기가 시기인지라 육사가 대통령 만드는 학교인줄 알았다. 입학을 하고 나서 신입생 소개 시간이 있었다. 동기들은 딱 두 부류가 있었다. 공부를 정말 잘하지만 집이 가난해 학비가 없어 일반 대학이 아닌 육사에 온 친구. 그리고 정말 군인이 되고 싶어 온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대통령 되는 학교인 줄 알고 왔다고 하니까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선배들이 저놈은 큰일 할 사람이 아니라 큰일 낼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이후 기합과 갈굼을 받을 때에도 대통령 되겠단 사람이 이런 것도 못 해? 그런 짓궂은 말을 들으며 괴롭힘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소위 유승민의 '개혁보수 실험'이 있었듯이 조 전 위원장 정도라면 당을 나가서 새로운 보수정당을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냐고 물었다.

 

현재 정당 시스템, 정치 구조, 선거제도 안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정치개혁이 일어나 모든 게 바뀐다면 예를 들어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사례처럼 무소속이라도 당선이 지금처럼 어렵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좋은 분들과 같이 중간지대에 모여서 정당을 할 수 있는 날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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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안녕하세요.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입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냉철함과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겠습니다. 더불어 일상 속 불편함을 탐구하는 자세도 놓지치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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