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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팬으로서 정말 “쪽팔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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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카타르 월드컵 중계에서 지상파 3사 중 꼴찌를 한 KBS가 이번 2023 WBC에서 사활을 걸고 방송인 김구라씨를 프리쇼 진행자로 섭외했다. 김씨는 얼마전 KBS가 제작하는 유튜브 채널 <구라철>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체코, 호주한테 지잖아? WBC 중계 망한 거다. 그렇잖아. 여기서 지면 (KBS 중계) 안 봐. 무조건 이겨야 한다.

 

사실 망했다고 볼 수 있다. 9일 정오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B조 1라운드 한국과 호주의 첫 경기. 한국이 7대 8로 졌다.

 

 

사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 야구는 권위있는 국제대회에서 정말 잘 했다. 한국 야구의 전성기였다.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이 KBO 프로야구 리그의 인기로 연결되는 선순환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난 WBC 대회(2013년과 2017년)와 도쿄올림픽(2021년)에서의 한국 야구는 처참했다. 그래서 이번 WBC는 그야말로 벼르고 또 벼르는 분위기였다. 작년 3월 야구인 최초로 KBO의 수장이 된 허구연 총재는 일찌감치 “우수한 선수를 발굴하고 철저한 전력 분석으로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호주전에서 이기지 못 했다.

 

한국, 미국, 일본은 자본이 꽤 들어와있는 프로야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는 만큼 야구 3대 선진국이다. 기타 미국 메이저리그에 선수들을 많이 보내는 중남미 국가들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소수의 유럽 국가들이 국가대표 야구팀으로서 가끔씩 나쁘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긴 했다. 호주도 딱 그 수준이다. 2010년 재창설된 호주 야구 리그(ABL)는 세미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를 오가는 레벨이다. 투수들의 평균 구속이 시속 120km~130km에 불과하고 선수들의 평균 연봉도 2~300만원이라고 한다. 그냥 용돈 정도라 호주 선수들은 거의 모두 투잡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한 호주 선수들이 야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호주 리그에서 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한국전에서 선발로 나온 잭 올로클린 투수만 하더라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산하 마이너리그 싱글A 선수다. 마이너리그는 트리플A(AAA), 더블A(AA), 싱글A(A+), 싱글A(A-), 루키(R) 등 5등급 시스템이다. 야구 전문가 대니얼 킴 SBS 해설위원은 이날 23시 라이브 방송을 켜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호주전) 선발 투수였던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싱글A다. 아무리 처음 만난 투수라고 하더라도 싱글A다. 99~100마일(159km) 던지는 투수도 아니고 90~91마일(144km) 정도다. 길게 던지지 않았지만 1회와 2회에서 퍼팩트했다. 이번 호주 대표팀이 그동안 WBC에 나왔던 호주팀들에 비해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팀을 상대로 경기도 졌고 모든 면에서 졌다. 그런 팀한테 홈런 3방을 맞았다. 대한민국 KBO 최고의 선수들인데 일본한테 3개를 맞은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모든 면에서 졌다. 타격, 투수, 본헤드 플레이, 주루, 작전 등등. 야구 전문가들도 충격을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스포츠조선 박재호 부장은 도쿄돔에 있었는데 호주전 종료 직후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나부터 반성한다. 나도 호주 야구를 과소평가했다”고 운을 뗐다.

 

질롱코리아(ABL에 참가하는 한국팀)가 호주에서 고전하던 것도 2군 선수들이 주력이고 유망주 위주여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번 대회에서 호주만 잡으면 최강 전력으로 평가 받는 일본을 피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조 편성이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호주보다 대한민국이 한수 앞선다는 생각을 해서였다.

 

박 부장이 들려준 중요한 메시지는 뒤에서 좀 더 다룰 것이다. 박 부장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속이 상한다”며 “그냥 마음이 참 열 받는다. 내가 도쿄에 괜히 왔나? 그런 생각도 든다. 나부터 통렬히 반성한다. 딱 4년 전 2019년 프리미어12 대만전에서 0대 7로 진 그 경기보다 충격이 더 크다”고 토로했다.

 

킴 위원도 “너무 화가 나서 (호주전 유튜브 생중계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일찍 껐다. 생각해보니까 잘 한 결정이었다. 순간 너무 많이 실망해서 말 실수도 할 수 있고 조금 캄다운하고 업된 상황에서 내려와서 다잡을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며 “이제는 조금 약간 슬프다기 보단 좀 우울했다. 우울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근데 이런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실력이 모자라도 한국 선수들이 정신력과 투지로 이겨냈는데 이번에는 너무 나태해진 것 아닌가? 그런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그냥 실력이 모자랐고 한국 야구의 수준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닉네임 ‘휴지통’으로 얼룩소에 글을 쓰고 있는 A씨는 “정신력이 아니라 실력이다. 우리나라가 패배한 이유는 집중력이나 투지 때문이 아니라 그냥 호주보다 못 했기 때문”이라며 “2009년 WBC 이야기는 가져올 이유 없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따낸 금메달도 우리가 잘 했기 때문이지 한국인의 투지가 빛나서였던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왜 자꾸 야구라는 공놀이를 민족의 얼, 정신력 따위와 엮으려고 하는 걸까. 선수들의 의지가 부족해서 패배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오대산 전지훈련을 떠난 1990년대 태평양 돌핀스 선수단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투지와 정신력을 외치던 김성근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강백호도 마찬가지다. 아쉬운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집중력, 투지 따위를 운운하며 이야기할 상황은 아니다. 강백호의 본헤드 플레이에 앞서 8점을 실점했기에 패배한 건데 누굴 탓하나.

 

박 부장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 문제’라고 했다.

 

선수들이 긴장한 것은 맞다. 긴장했다. 이정후 선수도 살이 빠졌다고 하고 선수들이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훈련에만 임하고 신경이 곤두선 그런 느낌이었다. 근데 본질은 야구 실력의 차이다. 이렇게 봤다. 한수 아래라는 호주 선수들에 비해 타자들의 펀치력, 변화구 대응력, 투수들의 제구, 다양한 구종 등등 한국이 앞서는 부분이 어디였는지 딱 꼽기가 어려웠다. 4회까지 퍼팩트에 5회 1사 이후에 첫 출루였다. 할 말이 없다.

 

 

킴 위원도 50분간 송출된 호주전 후토크 방송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지만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이 한국 야구의 민낯 즉 실력 부족이었다. 킴 위원은 강백호 선수의 세레모니사(死), 투수 운용, 박해민 선수와 나성범 선수의 주루 미스, 더 나아가 처음부터 선수 선발 명단부터 잘못됐던 것 아니냐는 네티즌들의 지적에 대해 “그런 게 본질이 아니”라며 “그냥 실력이 부족했다”고 결론냈다.

 

한국 야구가 메이저리그 선수도 배출해냈고 외국인 선수도 미국 가서 성공한 사례들도 나오고 있다고 했는데... 내가 한국 야구를 과대평가했던 건가 싶다. 물론 호주전 한 경기 졌다고 해서 벌써 그런 결론을 내릴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번 대회 얼마나 중요한지 선수들도 알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절실함이 부족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배불러서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서? 이게 실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집중력이나 절실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절실했고 최선을 다했고 준비도 많이 했고 근데 결과가 이랬다면 이게 결국은 한국 야구의 현주소가 아닐까?

 

타격의 문제점이나 어처구니 없는 실책 등을 지적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히려 킴 위원은 “투수, 투수, 투수가 문제였다”고 주장했다. 호주 타자들에게 홈런 3방을 맞았던 한국 투수력에 포커스를 맞췄는데, 킴 위원은 평균 구속 150km 중후반대를 던져줄 수 있는 강속구 유형의 최정상급 투수가 안우진 선수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학교폭력 논란에 대해 추신수 선수의 주장처럼 그냥 뭉개고 뽑아야 한다는 취지가 아니다.

 

안우진 선수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좀 달라질 수 있었다. 지금 선수 1명이 없어서 졌다? 물론 안우진 선수가 최고의 투수였으니까 그 선수가 빠진 것은 야구적인 측면에서 좀 아쉽다. 그런데 과연 안우진의 있고 없고의 차이였을까? 오늘 안우진이 있었다면 이겼을까? 아니 류현진이 있었다면 이겼을까? 그니까 안우진 같은 선수가 학폭 이야기 말고 야구적인 측면에서 그런 선수가 4명, 최소 3~4명은 있어야 한다. 많은 분들이 안우진 1명 없다고 아쉬워하는데 안우진 같은 선수가 3~4명 있어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안우진을 학폭 때문에 뽑지 않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안우진 같은 선수가 각 팀마다 1명씩은 있어야 한다. 그게 문제다. 왜 안우진이 1명 밖에 없는가? 이게 고민해봐야 할 남은 숙제다.

 

호주전 투수진을 보면 고영표·원태인·정철원·소형준·김원중·양현종·이용찬 등인데 킴 위원은 잘 던져준 투수들도 있었지만 한 마디로 “투수가 진짜 약하긴 약하구나”라고 평가했다.

 

변화구 던지다가 실투 나오면 뻥! 여러분들도 야구 전문가라서 잘 알겠지만 홈런 3방 맞으면 그 경기 이기기 어렵다. 물론 우리도 양의지 선수와 박병호 선수의 홈런성 2루타가 나왔지만 여러분 스리런 2방과 솔로 1방 맞았는데 그걸 어떻게 이기는가? 오늘 투수들 던지는 걸 다시 하이라이트로 보면 구속도 안 나오고 강속구 시대라고 하는데 변화구 떨어트리다가 덜 떨어트리면 홈런 나오고 계속 그런 패턴이지 않은가. 우리가 부족한 부분이 마운드가 아닌가. 힘으로 밀어붙일 투수가 없다. 언제까지 떨공삼, 떨공삼(슬라이더와 커브 등 떨어지는 변화구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해서 삼진을 잡는 것)인가. 떨공삼의 시대가 아니다. 강속구 투수의 시대다. 적어도 불펜에 힘으로, 속도로 밀어붙일 2~3명은 있어야 한다.

 

 

킴 위원은 투수력의 문제점을 집중적을 비판했지만 사실 타선에서도 답답했었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해설을 맡게 된 SBS 이대호 해설위원은 “다른 선수가 해주겠지”라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4회까지 호주 투수들에게 퍼펙트를 당한 타선의 침묵을 끊어낼 수 있도록 “내가 만들어낸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8회말 호주 투수들의 제구력 난조로 연이은 볼넷이 나왔을 때 밀어내기와 땅볼 타구에 의한 득점 외에는 시원한 단타 하나 없었다. 9회말에도 드디어 에드먼 선수가 안타를 치고 출루했을 때 한국인 최고의 타자 김하성·이정후 선수가 맥없이 플라이볼을 치고 물러나고 말았다.

 

킴 위원의 라이브 방송 도중 어느 네티즌이 채팅창에 “한국 야구팬으로서 정말 쪽팔린 하루였다”고 멘션을 올렸는데 킴 위원도 “맞다. 정말 쪽팔린 하루였다”고 동조했다. 그렇지만 쿨다운을 하고 돌아온 킴 위원은 궁극적으로 “바보 같지만 내일 한일전까지 믿어볼 것”이라며 “내일 지면 중국이나 체코 다 필요없고 8강 못 간다. 내일이 딱 데드라인이다. 내일 한 번만 더 믿어보고 일본 쉽지 않지만 이기면 거의 미라클 아닌가”라고 자기 암시를 걸었다.

 

자기 암시라고 표현을 한 이유는 현실적으로 이번 대회 최강의 전력인 일본을 이기는 것이 너무나 희박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야구 전문가들과 야구팬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라면 다들 한 번 더 자기 암시를 걸고 있을 것이다.

 

박 부장도 “한일전 우리가 한수 아래로 평가되지만 야구공은 둥글로 결과는 모른다. 한국 대표팀이 내일 기적을 만들어주길 기원한다. 참 간절하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대회 이전부터 기대감을 공유하며 야구 보도에 도움 말씀을 달라고 협조 요청을 했던 정의당 당원이자 야구와 축구에 관심이 깊은 스포츠팬 신영배씨는 한국 야구의 부진을 이렇게 진단했다.

 

MLB에서 세이버 매트릭스(야구를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가 유행을 타며 출루율과 장타율의 가치가 높아졌고 장타율을 높이기 위해 발사각, 어퍼스윙(배트가 아래에서 위로 퍼올리는 듯한 궤적을 그리는 스윙)이 타격 매커니즘의 주요 키워드가 되었다. 반대급부로 투수들은 이 어퍼스윙을 무력화하기 위해 공을 높이 그리고 빠르게 던지기 시작했고 심판진들은 그 하이패스트볼에 스트라이크를 잡아줬다. 일본과 한국간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지게 된 최초의 원인이자 팀 코리아의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MLB발 ‘어퍼스윙과 하이패스트볼’ 혁명 이후의 대응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본 리그와 달리 한국 리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부터 실력 차이가 많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비슷한 트렌드의 야구를 공유하며 일종의 ‘야구 이데아’를 구축하는 동안 (그리고 그 덕분에 많은 일본 선수들이 MLB에 진출하는 동안) 우리는 2008년 이후 4~5년간의 르네상스에 취해 야구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 리그의 트렌드를 연구하는 데 게을리했고 그게 계속된 참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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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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