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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역사 탐방 “왜 광주 대학생들만 철수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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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5.18 민주화운동 뿐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나름의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 만약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그렇게 못 했을텐데 역사 속에서 피를 흘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용기 있는 대학생들의 결기가 있었다. 그들은 서울역 회군을 단행한 서울 지역 대학생들처럼 회군할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소모임 앱 기반 역사 모임 ‘史뿐史뿐’에서 지난 25일 5.18 민주화운동 45주년을 맞아 광주로 역사 탐방을 왔다. 이날 방문한 곳은 △옛 505보안부대가 있었던 5.18 역사공원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관 △옛 전남도청 일대[별관+전일빌딩 245] △학살극이 벌어졌던 주남마을 등이었다. 

 

가장 먼저 505보안부대 터를 방문했는데 史뿐史뿐을 이끌어가고 있는 모임장 박진수씨가 이곳이 5.18 사적지로 지정된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사적지가 된 이유는) 첫 번째 항쟁이 벌어졌을 당시에 여기 505보안부대 요원들이 편의대라고 해서 쉽게 얘기해서 사복 요원이라고 하는데 이 사복 요원들이 광주 지역 내에 침투를 해서 시민군의 활동이라든지, 시민군 대상 와해 공작이라든지 이런 정보 활동들을 여기를 거점으로 펼쳤다. 두 번째는 연행된 사람들 중 주요 인물들은 여기로 데리고 와서 고문하고 신문을 했다. 이 건물에 지하실이 있다. 한 마디로 광주 지역 서빙고였다고 보면 된다. 

 

 

근데 분명 이곳은 군부대인데 군부대 모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박씨는 “부대 정문 같지 않게 생겼는데 다 위장을 해놨다”며 “옛날에는 505보안부대라고 적혀 있지도 않고 무슨 공사 무슨 무슨 연구소 이런 식으로 다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가 505보안부대의 본관 건물이다. 첩보를 갖다 수집을 하고 행정 지원을 하는 그런 건물들로 구성이 돼 있다. 근데 보안부대 치고는 사실 건물이 굉장히 작다.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일부 병사들을 제외하고 상당수가 간부급들 이상으로 되어 있는 보안사 요원들이 근무하던 시설이었다. 전투 부대가 아니다 보니 건물 크기가 이렇게 보시다시피 작았다. 지역 담당 보안부대는 문재인 정부 때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바뀌기 이전 기무사 때까지 지역 담당 보안부대로서 지역 일대 군 관련 첩보를 수집하는 걸 목적으로 운영됐다. 근데 실질적으로 뚜껑을 까보니까 세월호 때 가족들을 사찰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지금은 지역 기무부대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졌다. 옛날에는 지역 기무부대가 국정원이라든지 다른 기관과 협조를 하면서 관내에서 방첩 활동을 하는 것으로 규정이 돼 있던 부대였다.

 

참석자들과 박씨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기무사(현 국군방첩사령부)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2017년 연초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정국 당시 기무사가 작성했던 계엄령 관련 문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은 이 문제를 계기로 별건이긴 하지만 관련 혐의로 2023년 3월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조 전 사령관은 2017년 2월 계엄령 문건 작성 TF를 꾸려 구체적인 계엄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단순히 대규모 집회시위에 대응하는 군조직의 기조 차원을 넘어 24개의 정부부처를 전부 장악하는 세밀한 계획이 담겨 있었다. 비상계엄 선포시 광화문에는 공수부대, 여의도에는 기계화사단, 전국 각 지역에도 정해진 부대 투입 등 계엄군 편성안까지 마련됐다.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을 해제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구금하고, 서울시장 요청 없이 청와대 지역 위수령을 발동시켜 점차 확대하는 방안, 보도검열단을 만들어서 언론과 SNS 통제 및 폐쇄 등 상상하기 어려운 무서운 계획들을 수립해놨다. 기무사는 법률에 따라 계엄 선포시 계엄사령관이 되어야 할 당시 이순진 전 합참의장을 패싱하는 명령체계를 상정하기도 했다.

 

21세기에 국회를 해산하고 도심 한복판에 장갑차를 출동시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다음 행선지로 동구 금남로에 있는 기록관 건물에 들어왔는데 이곳에 오면 5.18의 개요, 배경, 전개, 의미 등등 5.18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꼼꼼하게 잘 돼 있다. 기록관을 동선대로 둘러보며 참석자들은 박씨의 설명과 함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무엇보다 서울역 회군 이후 광주 지역에서만 대학생들이 여전히 시위에 나선 배경을 두고 열띠게 토론했다. 1979년 10.26 사건과 비상계엄 선포, 12.12 쿠데타, 1980년 서울의 봄과 5.15 서울역 회군,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서 왜 광주가 타겟이 되었을까?

 

전국적으로 형성됐던 서울의 봄 분위기는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전남대와 조선대 대학생들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전개됐고 여기에 시민들이 호응하는 패턴이었다. 5월14일부터 광주에서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열렸으며 15일에 이르러서는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대학생들 수만명이 캠퍼스를 박차고 나가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연설과 집회를 이어갔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씨는 횃불시위를 하겠다고 공언했고 16일 저녁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종료되고 실제로 횃불시위와 행진이 진행됐다. 대학생들은 대학 휴교령이 내려지더라도 각 대학 캠퍼스에서 모이자고 합의를 해놓은 상황이었고,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광주 지역 모든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캠퍼스에서 모일 수 있었다. 이날 광주 학생운동 주요 간부들은 서울권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한대로 뿔뿔히 흩어져 피신했는데, 자정이 가까워지자 각 캠퍼스로 무장 군인 750여명(전북 익산에 주둔하고 있던 특전사 7공수여단 급파)이 투입되어 1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전남대와 조선대 등이 군부에 점령된 것이다.

 

 

박씨는 “전국 주요 대학 대학생들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가 실행하기로 했던 약속을 믿고 서울부터 부산까지 다 집회를 해산했다”며 “근데 유일하게 전남대학교만 믿을 수가 없어서 해산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12.12 직후 꼭두각시 권좌에 오른 신현확 국무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개헌 절차를 밟는 것과 별도로 정부 차원에서 대통령 직속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해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1980년 5월15일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전 의원은 학원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고 이를 더 발전시켜 야간 가두시위까지 이끌었던 인물이었는데, 서울역 앞 성토대회에 전국 18개 대학 10만명의 대학생들과 시민들까지 가세하자 마음을 바꿨다. 일명 ‘서울역 회군’이 결정됐다. 유혈 사태를 막자는 명분이었는데 신군부의 무력 진압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피부에 와닿자 두려웠던 마음이 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신군부는 그 직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5.17 쿠데타를 완성했다. 심 전 의원 본인도 수배 끝에 체포돼서 고문을 당했다.

 

참석자 A씨는 “왜 전남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는지?”라고 물었고 박씨는 “전남대 학생들도 사실 서울역에서 회군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면서도 그 이후 세세한 사실관계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래와 같이 설파했다.

 

윤상원과 박관현만 왜 거부를 했을까를 보게 되면 사실 나는 뭐가 제일 크다고 생각을 하냐면, 최근에 나온 연구 결과인데 위탁 교육으로 온 군 교육생들이 두들겨 맞았던 게 전남대다. 사실 우리가 5월17일 최초 사태가 어디서 벌어졌다고 여태까지 알고 있었냐면 좌우를 막론하고. 5월17일 휴교령을 내리니까 휴교령을 거부한 전남대생들 200명이 모여서 계엄군한테 먼저 돌을 던졌다! 이렇게 묘사가 됐다. 드라마에서도 그런 식으로 묘사가 됐는데 증언이나 작전 상황일지 기록으로 보니까 먼저 학생들이 돌 던진 게 아니라 이미 전남대 안에 공수대원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다녔다.

 

그래서 “사실 전남대생들 입장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회군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전남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었냐면 휴교를 했다고 하지만 도서관이나 이런 데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을 거 아닌가? 그 학생들을 갖다 두들겨 팼다. (왜 그랬는지?) 이유가 없다.

 

 

A씨는 수많은 대학 캠퍼스에 선제적으로 군인들이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는데 왜 유독 전남대만 타겟이 되어 그런 폭력을 당했는지 되물었다. 박씨는 “여기가 일단 첫 번째가 국립대학교고 아까 봤던 505부대 소속 사복 군인들이 전남대 핵심 운동권 인사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면서 “박관현과 들불야학에 있던 윤상원이 이전부터 접촉이 좀 있었는데 (서울역 회군 이후) 5월16일 광주전남 지역 대학생들만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라고 답했다.

 

회군하지 않은 배경을 두고 A씨는 혹시 “전남대 학생운동 주도자들이 강성 리더들이라서 그랬을까”라고 말했고 박씨는 “특별히 강성 리더들이라기 보다는 그전부터 군인들이 두들겨 패니까...”라는 가정을 재차 피력했다.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종합하자면 △5월 초중순부터 군인들이 전남대 캠퍼스로 진입해서 폭력을 행사했고 △그렇게 된 배경에는 505부대의 첩보 활동으로 광주전남 핵심 운동권들이 전남대생이라 중점 감시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에 따라 선제적으로 진압 작전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이고 △전남대생 지도부는 강성 리더였다기 보단 이미 폭력 피해를 당한 마당에 5.15 서울역 회군 이후에도 집회시위를 철수할 수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A씨는 “전두환 신군부도 한 번쯤 강력하게 폭력 진압을 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마침 광주와 전남대가 끝까지 저항하니까 울고 싶었는데 뺨 때린 것처럼 그렇게 한 것 같다”고 정리했다. 분명한 것은 “5.18이 없었다면 전두환의 독재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 했던 것도 특정 지역에서의 저항도 진압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데 서울 포함 전국에서 일어나는 시위를 진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던 거다.

 

 

한편, 이미 비상계엄 중이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가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박씨는 “국방부장관을 제끼고 대통령 직속으로 계엄사령부가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제주도가 포함됐다. 계엄에는 경비 계엄이 있고 비상 계엄이 있다. 또 전국 계엄과 부분 계엄이 있다. 근데 12.12가 막 터졌을 때는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계엄을 했다. 제주도가 어쨌든 제외돼서 부분 계엄으로 해석이 되어 계엄사령부는 모든 일을 국방부장관을 통해서 해야 했다. 그래서 전두환도 계속 그놈의 국방부장관 어디 갔냐. 난리를 쳤던 것도 거기에 있었던 거다. 그래서 전국 계엄이 되면 전두환이 앉혀놓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사실상 입법, 사법, 행정을 다 장악하게 되고 신군부가 대한민국 정권을 통째로 다 먹는 상황이 된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언제부터 보냐면 5월17일부터 본다. 1980년 5월17일부터 1981년 2월11일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그때까지다. 그래서 5.17 쿠데타가 기네스북에 세상에서 제일 오래 걸린 쿠데타로 올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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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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