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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생 ‘트라우마’가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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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부터 평범한미디어에 연재되고 있는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13번째 글입니다. 조은비씨는 작은 주얼리 공방 ‘디라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우울증 자조 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게으르게 쉬는 중”이며 스스로를 “경험주의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입생로랑 백. 공무원 학원에 다녔던 2개월. 매주 심리 상담에 가서 펑펑 울었다.

 

꼭 6개월 안에 합격해야 되는 건가요?

 

상담 선생님은 늘 지금 잘하고 있다고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더 없는 것 같았다.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대학 동기들은 이미 몇 년 전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입생로랑, 디올, 루이비통.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면 하나쯤 장만하는 명품백도 들기 시작했다. 사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나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 만났던 애인의 엄마도 합격만 하면 입생로랑 백을 사준다고 했다. 인정을 해주겠다는 모두가 나를 응원했다. 그래서 등떠밀리듯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여러 직장을 그만두고 여러 직장을 들어가지 못 하고 돌고 돌아 내가 드디어 주변을 만족시키는 뭔가를 하는구나. 그렇게 공무원에 합격하기도 전에 뿌듯했다.

 

 

그래서 나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 모두가 응원해주는데. 그나마 잘한다고 생각했던 암기 공부인데. 5급이나 7급도 아니라 9급인데. 학원 진도를 못 따라가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일 공무원 학원에서 벽에 붙여놓는 <진도 시험 상위 20% 수강생 명단>에도 없는 주제에 힘들어하는 내가 너무 괘씸했다.

 

이것도 못 버티면 뭘 하려고? 그냥 죽어. 모두에게 짐이야. 지구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데 네가 마시는 물과 공기가 아깝다.

 

또 다시 익숙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6개월도 아니고 2개월 안에 독일어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촉박한 준비 기간. 새로운 언어를 익힌다는 막막함에 자꾸 공시를 준비했던 때가 생각난다.

 

너 한국에서 도망치는 거지?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너 그렇게 잘났어? 학문적인 욕망이 그렇게 간절해? 학비에 드는 1만 5000유로 있어? 그러다 외국에서 혼자 늙고 추해질걸....?

 

숨이 막힌다. 침대로 가서 반려이불의 냄새를 맡고 세게 끌어안아본다. 악마를 쫓기 위해 찬송가를 듣는 것처럼 동기부여 팟캐스트를 계속 틀어놓는다. 게스트로 나온 전문가들이 말하는 건 다 비슷하다. 나를 믿고 이해해주기, 모든 것에 감사하기, 결과가 어떻게 됐든 내가 감당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즐길 것. 이제는 대학원에 합격해도 입생로랑 백을 사준다는 사람은 없다.

 

주얼리를 더 공부하고 싶은 건 나 혼자만의 바람이다. 주얼리 공방을 운영하면서 늘 더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나처럼 모양이 일률적이지 않은 진주를 좋아했다는 엘리자베스 1세 관련 논문을 밤 늦게까지 읽었던 날들과 유럽 앤틱샵에서 파는 오래된 주얼리를 보면 발길을 떼지 못 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전세계에서 나보다 더 간절한 마음과 뛰어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대학교에 지원할 것이다.

 

그래서 익숙한 목소리는 끊임없이 돈낭비라고 비상 알림을 울려댄다. 앞날을 장담 못 하는 불안한 자영업자에게 돈은 너무 중요한데 비엔나에서 돈만 써대고 돈 쓸 일을 더 만들고 있으니. 이 목소리는 미칠 지경이다.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없는 게 인생이란 걸 안다. 하지만 돈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꾸 내 세상이 좁아지는 게 슬프다. 언제부터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생겨도 비용과 실패가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래서 이번만큼은 밀고 나가고 싶다.

 

그래. 입생로랑 백은 못 사주지만, 어디 한 번 해봐.

 

내가 나한테 말해주고 싶다. 결과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대학원을 준비하는 이 모든 과정을 즐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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