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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주변인 같은 ‘스노우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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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4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가끔은...... 제가 커다란 스노우볼 위를 기어다니는 달팽이 같아요. 스노우볼 안에는 예쁜 집도 있고, 웃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선물 꾸러미도 있고,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저는 그걸 계속 바라보면서 들어가지는 못해요. 들어갈 방법도 없는 것 같고.

 

 

오스트리아에서 사는 건 스노우볼의 투명한 표면을 기어다니는 달팽이 같았다. 아니 달팽이는 집이라도 있지. 나는 집도 없는 민달팽이였다. MAK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나오면 저녁 6시. 이미 밖은 깜깜해져 있고 숨을 뱉으면 차갑게 얼어 하얗게 보이던 겨울. 숙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가장 가까운 역으로 가지 않고 나는 거기서 빈 시내인 슈테판플라츠까지 걸어간 뒤 지하철 타는 걸 좋아했다. 그 길은 ‘스노우볼’들이 가득했으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스노우볼은 고급 ‘슈니첼’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 밖 거리에서 말끔하게 닦인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 내부는 따뜻한 주황색 조명, 구김 하나 없이 도톰한 흰색 천으로 덮인 식탁, 진짜 촛불, 고급스러운 앤틱풍 원목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내 시선은 늘 그곳에 있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표정에 멈췄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행복한 눈과 웃음. 그래 여기서 내겐 저런 사람들이 없지. 그곳을 지날 때면 늘 달팽이처럼 걸음이 느려졌다. 더 오래 그 스노우볼을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똑바로 그 안을 쳐다보긴 싫었다. 스노우볼 위를 기어다니는 민달팽이처럼 보이긴 싫었다. 저런 건 흔해 빠진 일상처럼 취급하고 싶은 이상한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저기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나도 이 사회에 속하고 싶다. 포함되고 싶다. 민달팽이 주제에.

 

사실 스노우볼은 지구 반대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상담 선생님과 언젠가 ‘성벽’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른 대학 동기들처럼 저도 성벽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선생님은 작은 한숨을 쉬고난 후 힘주어 물었다.

 

그럼! 성벽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돈 많은 남자를 물어야 하나요.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할까요. 한국에서 이 나이에 신입 공채는 안 될 거고, 로스쿨에 들어갈까요. 아니면 교대?

 

말하면서 나는 웃었다. 울면서 웃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모교의 야외 벤치에 마주 앉아 상담하고 있었고. 수업이 끝났는지 신학 대학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 나와 지나갔다.

 

은비씨 만약 지금 저들처럼 다시 학교에 들어간다면 어떨 것 같아요?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어요. 놀고 싶어요. 동아리 활동도 더 해보고. 그때는 연애만 애인에게만 몰두했는데 더 많이 공부하고 뭐든지 배우고 싶어요. 은비씨 그럼 그걸 지금 해봐요. 물론 50살이 되어서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그걸 하는 게 더 쉽잖아요? 지금 은비씨는 결혼 하지 않았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없으니까요.

 

 

이날은 너무 많이 울었다. 눈물과 파운데이션이 뭉쳐서 딱딱하게 굳은 피부를 움직여 나는 옅게 웃었다. 오늘 상담비는 받지 않을게요. 안전한 상담 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미안해요. 다음 상담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다 다시 만나요.

 

두달 뒤 나는 공방을 재계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갔다. 귀국행 티켓을 끊지 않아서 몹시 개운했다. 이제 더 이상 저 성벽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1년 3개월 후 다시 성벽이 있는 내 나라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라는 스노우볼에 만족할 만큼 들어가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그 스노우볼을 기어다닌지 1년이 다 될 무렵 스노우볼 식당에 같이 갈 친구들도 몇몇 생겼을 때 쯤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오스트리아를 떠나야 했다. 민달팽이라는 신분도(비자) 끝나서 스노우볼을 기어다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한국행 비행기는 한국인 승객들로 꽉 차 있었지만 옆자리 승객은 내게 서툰 영어로 등받이 쿠션을 안 쓰면 자기가 써도 되냐고 물었다. 그들에겐 내가 ‘그’ 스노우볼 안의 사람처럼 보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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