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비의 비엔나 라이프] 23번째 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조은비 디라이트 대표]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직전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윤 기자는 내게 귀국 후 계획을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생각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던 중요한 질문이었으니까. 공방을 지속하리라 믿었던 부모와 고객의 기대를 배반한 뒷감당이 두려웠다. 하지만 소명으로 여겼던 주얼리 일이 내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 같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였다. 커다란 빗자루로 모든 것을 내 삶에서 쓸어내 버렸을 때 무엇이 남을까. 그래서 2023년 겨울 계약이 종료된 공방에서 가구를 혼자 정리하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사라진 것들이 슬펐고 뒷감당이 무서웠지만 미치도록 홀가분했다. 그래서 울다가 웃었다.
길고 긴 여행이 끝난 뒤 배반의 대가는 실체를 드러냈다. 살려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일을 해야 했다. 과거 출강했던 곳들에 먼저 전화를 돌렸다. 누군가 전화를 받으면 미리 메모장에 적어둔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그들의 미지근한 반응이 내 말을 끊기 전에 적어도 준비한 말은 다 전하고 싶었으니까. 새 공방 자리도 알아보고 있다. 예산에 만만한 매물들은 대부분 범죄 영화에 나오는 화장실을 갖고 있다. 조명도 없는 곳에 누런 때가 잔뜩 낀 와변기만 덩그러니 있었다. 1년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에서 배반의 모험을 즐긴 대가는 이런 것이다. 대가가 이런 것인지 알았다면 나는 그 무모한 결정을 철회했을까?
아닐 것 같았다.
내가 김민희에 대한 소식을 들은 건 함께 금속공예를 배우는 동료들로부터였다. 김민희와 홍상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그러고보니 작년쯤 SNS에서 김민희가 해외 영화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났다.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이고, 평범한 검정 색 원피스를 입고 객석에 앉아 있었던 그녀. 수상자 발표를 듣자마자 홍상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웃는 김민희는 편안해보였다.
분위기, 연기력, 외모, 재력. 모든 것을 다 가진 탑 여배우가 늙은 영화감독, 그것도 유부남과 눈이 맞아 해외로 떠난다는 소식은 당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연예인은 ‘완전 무결한 공인’이어야 하는 한국에서 그녀의 결정은 국민을 배반한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 대가로 김민희는 광고주로부터 수억대의 위약금을 물어야 했고, 한국 광고업계와 방송업계에서는 더 이상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 언론에서 홍상수 부인의 인터뷰를 다루었고, 김민희는 화목한 가정을 파탄낸 “쌍년”이 되어 지금까지도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다.
“김민희는 홍상수 정말 사랑하나봐.”
내 입에서는 욕설이 아닌 놀라움이 새어 나왔다. 다른 여자는 모르겠지만, 김민희가 그의 아이를 낳았다면 그건 사랑의 증거였다. 그녀라면 사회적 통념이나 원치 않는 임신으로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 홍상수를 선택하면서 사회적 통념을 배신했으니까.
한병철은 책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 시대에 사랑은 다 죽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내 환상, 내 목표, 내 꿈을 성취하기 위해 안락함을 주는 대상과 맺는 계약이 아니다. 나와 완전히 다른 타인을 경험하다가 상처 입고, 광기에 휩싸이고, 위험에도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다른 것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엄청난 경험이 된다. ‘나의 행복한 삶’과 ‘나’를 1순위에 두는 현대 사회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게 불가능한 이유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까지 가지 않더라도 나와 다른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한국의 여러 사회 문제 중 하나가 다양성과 개인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김민희가 한국에서 이룬 것들을 배반했을 때 느낀 감정을 미약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도 나처럼 홍상수와 해외로 떠나기로 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을까? 강렬한 슬픔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껴서.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에 김민희의 사랑이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