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하지 않아줘서 감사합니다”

배너

능력주의=노력주의?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정치학자 김만권 교수(경희대)는 대뜸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했다.

 

우리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 했다

 

지난 4월29일 저녁 광주청년센터에서 주최한 강연에 연사로 나선 김 교수는 강연 도중 진심을 담아 위와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주제는 <디지털, 능력주의 그리고 외로움>이었는데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론이 핵심 키워드였다.

 

 

하나씩 내용들을 풀어보고자 하는데 먼저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김 교수는 사회적 재분배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역설했다. 부가 소수 집단에 집중될수록 사회적 다수는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왜냐면 기술의 발전과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증기에서 전기로 넘어가면서 생산력 자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벨 에포크 시대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이다. 늘어난 부는 특정 계층에게만 몰렸다. 그렇게 되면 소비력 자체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일부 계층에 돈이 많이 있더라도 그 계층의 소비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경제대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 경제 불황과 호황의 사이클은 흐르고 또 흐른다. 지금도 역사적으로 가장 부가 많이 쌓여 있으며 계속 증가하고 있다. 김 교수는 반문했다. 

 

그래서 부의 혜택을 여러분들은 느끼고 있는가? 잘 안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그 부의 근원이 디지털 기술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 격차는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디지털 기술은 기본적으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소수들에게 이어지고 다수들을 배제시킨다. 점점 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소수가 되면 우리는 그 소수에 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된다. 그 경쟁을 하는 집단은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집단들이다.

 

이러한 환경과 구조 속에서 20대 청년은 가장 큰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통계적으로 봤을 때 노인 세대보다 20대가 가장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20대가 다 그렇게 느낀다. 20대가 제일 위험하다. 우리나라는 더 심하다. 

 

본격적으로 김 교수는 능력주의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능력주의의 나라다. 사람들은 능력대로 분배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고 여긴다. 공정과 평등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개념들을 등치시킨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외부에서 이걸 줄이기 위해 개입을 하면 ‘별 문제 없는데 왜 개입하나’라는 주장이 나온다. 나를 위한 정책을 밀어내는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외부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 모든 문제를 돌파해 나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렇게 되면 직업 시장에서 나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경쟁 사회에서 나오는 문제 중 하나는 남을 도와주지 않는 문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예전에 노동시장이 좋았을 때는 학교에서 서로 도와줬다. 그러나 요즘 그런 문화는 사라졌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누굴 도와주고 자시고 할 환경이 되지 못한다.

 

 

소위 말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다. 김 교수는 능력주의가 ‘끼리끼리’ 문화를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능력주의 사회는 ‘끼리끼리’를 유발한다. 아파트 단지끼리 나눠서 비슷한 소득 수준과 환경을 가진 아이들끼리 어울리게 된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성장해서 서로 유사한 레벨의 직업 시장에 들어가려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누군가는 진입하고 누군가는 진입하지 못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진입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실망하여 방문을 걸어 잠가버린다.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사회 구조적으로 너무나 치열한 경쟁과 능력주의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청년들의 고립, 운둔 상태가 심각해지기 때문에 올해 연말 아니면 내년 초에 서울시에서는 외로움 담당 부서가 생긴다는 말까지 나온다.

 

2022년 서울시에서 실시한 <청년 고립 은둔 실태 조사>를 살펴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대략적으로 조사의 기준은 6개월 이상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지 않았거나 6개월 이상 사람 만나는 일을 물리적, 정서적으로 회피한 경우를 삼았다. 이 상태가 고립, 은둔 상태다. 조사를 해봤더니 이러한 상태에 있는 청년들의 비율이 4.5% 였다. 19세에서 39세까지의 노동 시장에 들어가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대략 숫자로 환산해보니 서울시만 12만 9000명에 달하고 전국적으로 확대해 살펴보면 무려 61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왜 고립되었을까?

 

조사에 따르면 64.6%가 성인이 된 이후 원하던 시기에 취업에 실패했다. 취업이 제일 중요하다. 노동시장에서는 다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기성세대는 여기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 ‘그 다음 직장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다니는 직장에 내가 들어가지 못 했다면 나는 열등감과 패배주의를 느끼며 고립하고 은둔하게 된다. 이렇게 고립, 은둔에 들어간 청년 중에 10년 이상이 된 사람도 최소 7만명이나 된다.

 

사태가 꽤 심각한데 우리는 그동안 왜 이리 둔감했을까? 김 교수는 “고립 문제의 특성이 비가시성이다. 기본적으로 숨어 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심각성을 잘 인지하지 못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이후 김 교수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는데 감동적인 사연이었다.

 

작년 4월 수원에서 강의를 하고 나왔는데 한 여성 청년이 초콜릿을 주면서 연신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분도 고립 청년이었고 그날 강의를 듣기 위해 6년만에 집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만 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본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게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여겼다. 능력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노력을 안 하는 게 아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이유가 무엇일까? 작금의 세상은 너무나도 변화가 빠르다. 정말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세상이다. 따라잡기가 벅차다. 수저 계급론이 횡행할 만큼 태생적 배경에 따른 게임 결정론이 지배적이다.

 

한 2~3년 고립되어 있다가 세상에 나오면 너무 달라져 있다. 젊은 사람이라도 이것을 따라잡기는 버겁다. 2010년 이후로 그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기간도 결정적이었다. 이로 인해 젊은 우울증 환자도 증가하고 있다.

 

김 교수는 요즘의 세태를 ‘신뢰’가 없는 사회라고 정의했다. ‘신뢰’라는 단어를 정치학적으로 풀어 보면 ‘사회적 자본’이다. 그 신뢰가 무너진 사회를 자연상태라고 부른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그 자체이자 각자도생의 시대다. 특히 2030세대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다. 이렇게 극도의 사회적 불안감이 높을 때 사이비 종교나 극단주의 정치 세력들이 등장하곤 한다. 독일 사회가 혼란스러웠을 때 히틀러가 구원자를 가장하며 득세했다. 외롭고 불안한 대중이 전체주의를 만든다. 미국에서도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표를 많이 주었다. 김 교수는 “구원은 극단에 있다”며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일수록 극단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했다.

 

나아가 디지털 기술은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킨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교수(뉴욕시립대)는 ‘2대 8 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쓸 수 있는 20%와 그렇지 못한 80%의 격차가 너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상위 5%가 소득을 독식하고 있다. 기술의 속도가 계속 빨라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일자리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다시 한국적 능력주의로 돌아가보자.

 

사람들은 한정된 대기업의 일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한다.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비율은 아무리 넓혀 봐도 15% 정도다. 그러니 여기에 무임승차, 공정성 논란 같은 것들이 벌어진다. 능력주의 용어를 만든 마이클 영은 IQ로 대표되는 재능과 노력으로 능력이 완성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노력은 디폴트값이다. 똑같은 노력을 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재능이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재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혹시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내가 재능이 뛰어나서 성공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이 열심히 해서 성공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능력주의=노력주의가 된다. 이 노력주의는 도덕주의가 된다. 이게 왜 문제냐면 밀려난 사람들은 노력이 부족했으니 안 도와줘도 된다고 정당화가 되어 버린다. 능력주의 사회로 갈수록 도와달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이기적인 엘리트가 양산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내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엘리트들은 점차 공감 능력을 상실한다. 능력주의가 노력주의가 되어버리면 성공한 사람들은 노력했으니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져가 버린다. 반대로 밀려난 사람들은 그저 게으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면 아주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다.

 

평범한미디어에서도 지속적으로 능력주의 비판론을 다룬 적이 있는데 얼마 전 출고한 <불편한 하루> 대담에서도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김 교수는 언젠가부터 대학 강단에 서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면 가슴이 아프다.

 

애초에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능력주의가 잘못된 거라고 이야기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좋은 거라고 쓰고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 한 사람은 사회에 항의하지 못 하고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돌린다. 자기 혐오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만든 것은 분명 여러분이 아니다. 우리 기성세대인 것이다. 이 시스템과 통계들을 보면 정말 반성 많이 해야 한다. 여러분에게 너무 죄송하다. 나는 3년 전부터 학부 강의를 나가지 않았다. 점수 매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취업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추천서라도 써줬다가는 분명 공정성 시비가 붙는다. 그저 학생들에게 밥이나 커피 사주고 이야기라도 들어 주는 일 밖에 없다.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는 격언은 현 시점에서 잘못된 말인 것 같다. 청년 세대를 도와줘야 한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도움이 제일 많이 필요한 세대다.

프로필 사진
윤동욱

안녕하세요.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입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냉철함과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겠습니다. 더불어 일상 속 불편함을 탐구하는 자세도 놓지치 않겠습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