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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의 뷰 포인트⑫]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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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문명훈 칼럼니스트] 코로나로 일도 줄고 여러모로 힘들고 불편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드라마와 영화를 찾아보게 됐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혼자 있는 시간이 늘고, 그 시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넷플릭스, 왓챠, 티빙, 웨이브를 넘나들며 영상 콘텐츠를 찾아보게 됐습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싸이코지만 괜찮아〉 〈손더게스트〉, 영화 〈인턴〉 〈리틀포레스트〉 등 순간 떠오르는 작품들만 해도 많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1년 반 동안 그 전에 10년간 봤던 드라마 영화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본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너는 나의 봄〉이라는 작품을 보고 있는데요. 로맨틱 코미디에 스릴러가 가미된 드라마입니다. 제게 이 드라마는 심정지 상태에 있던 연애 세포에 심폐소생술을 해주는 작품입니다. 서사도, 대사도, 연기도 뛰어나서 드라마 한 편을 보고 새벽까지 유튜브 관련 영상을 돌려보곤 합니다.

 

여느 드라마가 그렇듯 〈너는 나의 봄〉에도 다양한 갈등과 대립 구도가 있는데요. 심장이식수술로 언제 죽을지 몰라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내려는 영도(배우 김동욱)와 그를 붙잡으려는 다정(배우 서현진)의 서사가 로맨스의 중요한 축입니다. 영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자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이별을 고하려고 하고, 다정은 로맨스 영화에서 '영원'은 2시간 짜리라며 자신은 2시간짜리 영원도 괜찮다고 남자를 붙잡습니다.

 

무엇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무엇이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 뿐 아니라 다른 작품이나 일상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는데요. 서로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달라 갈등을 겪고 이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을 다룬 글([문명훈의 뷰 포인트⑩]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연애에 대한 '상황 정의'가 서로 다른 겁니다.

 

 

자주 얼굴 보고 연락을 주고 받는 것,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것,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것 등은 사랑하는 관계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서로에게 기대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고 있죠.

 

심한 경우에는 사랑 자체에 대한 이해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성관계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밀도있는 정서적인 교류가 사랑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마 현실의 사랑은 그 사이의 어디쯤일텐데요. 드라마 〈알고 있지만〉은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달라 생기는 갈등을 잘 보여줍니다. 주인공 박재언(배우 송강)은 가벼운 만남과 썸을 추구하지만 상대인 유나비(배우 한소희)는 불안정한 관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랑관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엮이면서 작품의 핵심 플롯이 만들어지죠. 사랑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가 크면 관계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단어도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언어에 확정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벗어나면 틀렸다고 주장하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스킨십을 피하는 상대는 틀렸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이야기에 공감해주지 않는 상대는 진심이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사랑관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틀린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가끔 ‘사랑’이라는 단어에 단일한 정의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뿐만이 아닙니다. 추상화된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정치사회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권리’나 ‘자유’ 같은 개념에도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른 의미로 쓰이죠. 그런데 논쟁이 생길 때마다 갈등의 당사자들은 자신과 다른 의미로 개념을 사용한 사람들을 틀렸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지속적으로 ‘기본소득’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기본주택, 기본대출 등 ‘기본’ 시리즈의 정책을 계속 발표하고 있죠.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란에는 ‘자유’ ‘자본주의’ ‘사회주의’ ‘복지’ ‘시장’ 등 여러 개념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그 용어들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소득 반대론의 핵심 주장은 기본소득이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시장 질서를 파괴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의 보장이 중요한데요. 역설적이게도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측의 핵심 주장도 자유의 보장에 있습니다. 개개인의 기초적인 수요를 충족하는 것이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필수 전제라는 논리죠(조만간 기본소득에 대한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기본소득 논쟁에서 찬반 양측은 ‘자유’라는 개념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유’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한데요. 연인 사이에서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다를 때 ‘너의 사랑은 틀린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처럼 단정적으로 ‘자유’의 의미를 규정하고 상대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언어를 진리로 선언하는 것이 손쉬운 대응이겠지만 언어의 의미는 그렇게 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는 상황과 맥락이 만든다

 

언어의 의미를 연구한 학자 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인데요. 지난 글([문명훈의 뷰 포인트⑪] 언어의 힘 '행위를 유도하다' )에서 언급했던 언어철학자 오스틴에게도 영향을 준 학자입니다. 그는 언어에 대한 정반대의 두 가지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입니다.

 

 

학자들은 편의상 전기 이론과 후기 이론으로 구분하는데, 전기 이론(《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세계의 구조에 대한 묘사라고 봅니다. 현실의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한 언어만이 참된 언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전기 이론을 ‘그림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현실에 대한 상을 마음 속에 품고 있고 그 상을 표현한 것이 언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정확한 표현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현실과 언어가 1대 1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후기 이론(《철학적 탐구》)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전기 이론을 발표하고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로 지낸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의 언어 사용을 관찰하면서 언어의 성격을 다르게 보게 됐습니다. 그는 언어의 의미가 현실과 언어의 1대 1 대응이 아니라 언어 사용의 맥락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건축 현장의 예를 제시하는데요. 누군가가 “석판 다섯 개”라고 말했다면 “석판 다섯 개”라는 말은 석판 다섯 개가 있다는 보고일 수도, 석판 다섯 개를 달라는 요청일 수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언어는 애매모호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죠.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고 보면 당연히 언어의 의미를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상황을 게임을 배우는 것에 비유합니다. 아이들이 게임을 처음 배울 때 규칙과 게임 참가자의 역할을 익히는 것처럼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의미를 만드는 규칙과 발화자의 역할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기 이론을 ‘게임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때 규칙과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적 했던 공기놀이의 규칙은 동네마다 달랐고 고스톱 규칙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부루마블 같은 보드게임을 할 때 상황에 따라 규칙을 추가하기도 하죠. 게임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엄밀하고 고정된 규칙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경험과 맥락 속에서 쌓은 느슨한 규칙이 적용되죠. 우리는 숙련과 훈련을 통해 그 규칙을 익히게 됩니다.

 

 

드라마 속에서 사랑이 흔들리고, 현실의 연인도 서로에게 불안을 느끼지만 소통을 하고 공통의 경험을 쌓게 되면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도 어느 정도 조정되고,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비슷한 상황 이해와 규칙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소통의 문제를 언어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life of form)을 일치시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통의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데요. 공통의 경험이 상황 이해의 간극을 메워주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사람들은 자유와 권리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에 커다란 인식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진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없다면 같은 글자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됩니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다툴 뿐 합의에 도달하기는 어렵죠. 그래서 저는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가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되묻게 됩니다.  연인들이 그렇듯 같은 언어를 쓰려면 서로 부대끼며 교류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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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훈

학생들과 철학, 역사, 사회 분야를 공부하는 인문학 강사입니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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