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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원의 철학하기①] '놀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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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천양원 기자] 어린 아이들은 노는 것을 좋아한다. 일상을 노는 일처럼 재밌게 여긴다. 매순간 자신의 삶을 즐거움과 재미로 채워놓고 그렇게 살아간다. 

 

어른들의 보호를 받는 와중에도 다양한 삶의 형식을 체험한다. 다채로운 재미를 통해 다양한 삶의 형식을 체득한다. 언어체계를 구축하기 이전에 온몸으로 온갖 재밋거리들을 경험한다. 이런 삶의 방식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귀가하기 전까지 반복된다. 물론 집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소리와 행동의 놀이를 지속한다. 

 

 

아이들은 놀이터나 놀이공원에 갔더라도 스스로 구축한 ‘재미의 질서’대로 놀지 못 하게 된다면 큰 감흥을 못 느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은 지금 여기서 생동하는 아이(I)로서 존재하지 못 하고 우리(fence) 속에 갖힌 아이(child)일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빨리 와”라고 했다면 이 말은 명령하는 말일까? 부탁하는 말일까?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본인의 저서 <철학적 탐구>에서 말을 할 때 화자가 함의하고 있는 맥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언어 게임’ 이론으로 정리했다. “빨리 와”라는 말은 두 사람의 관계성에 따라 형성된 특정 상황과 맥락이 그 의미를 규정한다. 그래서 명령이 될 수도 있고, 부탁이 될 수도 있고, 감탄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나를 위축시키는 객관적인 상황 속에서 스마트폰 메시지로 “빨리 와”라는 말을 접했다면 그것은 나를 구속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이 상해서 스스로 쪼그라들지도 모른다. 반대로 평소에 밥과 커피를 자주 사주고 내가 원할 때마다 삶의 철학을 마음으로 얘기해주는 사람이 전화로 “빨리 와”라고 한다면? 나는 ‘배려와 부탁’의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언어를 구성하고 수많은 의미체계를 구축해간다. 우리가 습득하는 삶의 방식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언어 게임에서 비롯된다. 가족, 친구, 학교, 회사, 동호회 등 우리는 삶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언어 게임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한 개인은 여러 공동체에서 익힌 언어 게임들을 습득하면서도 주체적으로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주’와 ‘달아남’을 능숙하게 할줄 알아야 한다.

 

 

다시 돌아와 아이들은 조금만 성장하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과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학교에서 사회적 규율을 학습한다. 가정과 사회는 아이가 배울 규율을 나름의 체계적인 룰로 만들어놨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어간다. 기실 노는 시간이나 또래와의 교류를 할 때도 아이들은 느슨한 형태의 규율을 몸에 각인시킨다. 아이들은 사회 속에서 어떻게든 순한 양이나 낙타가 되는 일을 경험한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모든 생명체가 자기 생명의 숨을 발출하고 싶어 안달인 까닭에 아이들 역시 자신이 짊어진 짐을 벗어버릴 기회를 노린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먼 곳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기존 질서를 타파하는 사자'를 꿈꾼다. 물론 몸에 새겨진 관성은 사회의 객관적 놀이 구조와 맞물려서 아이들을 옭아맨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기어코 대학에 입학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기 위해 돈에 매몰되며 그런 사회 통념의 질서에 질식당하면서 커간다.

 

우리는 삶 속의 수많은 우연들과 맞부딪치며 온갖 자기 놀이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환경을 객관화해서 관찰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기후위기 보다도 눈앞에 놓여진 여러 작은 우연들에 쉽게 휘둘린다. 어찌보면 가정도, 학교도, 직장도, 국가도 그런 우연들에 개인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도와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개인이 습득한 삶의 형식과 언어의 형식은 다시 개인의 인식틀을 규정한다.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아래와 같다.

 

첫째, 낙타나 사자나 아이의 모습이 일단은 우리 인간을 잘 나타내는 형상인지 살펴야 한다.

 

둘째, 현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통상 우리가 마주하게 될 삶의 다양한 놀이구조들이 우리를 어떻게 사자가 아닌 낙타로만 만들고 있는지 탐문해봐야 한다. 

 

셋째, 인간의 삶은 외부적 요인에 따라 삐걱거리기 마련인데 그런 우연 요소들에 기민하게 응대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기민하게 응대하는 문화를 어떻게 구상해야 할까?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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