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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로 ‘세월호 아저씨’, 7년만에 활동 접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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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진상규명” 충장로 우체국 앞 리본 나눔
2015년부터 7년째 진행해온 김일수 씨
아시아문화의전당 조경직 근무 시작
정치활동 문제될까 우려...선전전 중단
“밥 못먹는 느낌...말로 표현 못하게 안타까워”
“전국적 활동 더 왕성하게 이어갈 것”

[평범한미디어=김현 기자]

 

7년. 김일수 씨가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친 시간이 자그만치 7년입니다.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시민들에게 나누는 활동. 그동안 시민들, 특히 많은 청소년들의 소지품에는 그가 나눈 노란 리본이 걸렸죠. 그들 사이에서 김 씨는 “세월호 아저씨”라는 별명이 붙었다죠.

 

그런 그가 3월13일 마지막 나눔을 진행했습니다. “끝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간이 허락하는 한 진행해왔던 활동이 막을 내린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안타깝습니다.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평범한미디어는 광주 서구 김일수 씨의 자택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리본 나눔 활동을 중단하는 이유에 대해 “안타까운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새로 취직한 직장에서 리본 나눔 활동을 어떻게 바라볼지 우려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정부 시절, 세월호 관련 활동을 하다 해고를 당해본 경험이 있어서라는 겁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김 씨의 우체국 앞 활동은 2015년 7월에 시작됐습니다. 그는 당시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진도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모형배를 끌고 올라가는 활동에 참가한 뒤 광주에서 혼자라도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한 것이지요.

 

“당시 세월호광주시민상주모임이 각 마을별로 촛불을 들었어요. 거기를 한바퀴 순회했는데, ‘돌아다니지 말고 한군데 고정해서 하는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아! 광주의 로데오거리, 광주의 명동인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 해야겠다.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리본 나눔 활동은 직장을 잃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당시 아시아문화전당에서 기계직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가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계약해지됐다는 설명입니다.

 

“박근혜 정부 때였죠...그때 공무원들이 지금은 (문화전당에)안계시는데, 당시 부서장이 리본 나눔 활동을 아주 고깝게 봤어요. ‘용가리 통뼈냐’ ‘뭔데 그런걸 하냐’ 험담도 듣고 여러번 불려가기도 했고 결국엔 계약해지당했죠. 그런 기억이 있다 보니까 이제는 활동을 계속 하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 씨는 최근 아시아문화전당 조경직으로 다시 근무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공무직(무기계약)으로 전환되긴 했지만, 또 다시 활동이 문제되진 않을까 우려된다는 게 활동 중단의 이유입니다.

 

 

1주에 3~6회, 우체국이 문을 닫는 저녁 시간대면 나타나 리본을 나눴던 김일수 씨. 시작할 때 51세였던 나이는 어느새 57세가 됐습니다. 50대를 통으로 세월호 활동과 함께 보낸 셈. 세월호 진상규명 문구를 적은 망토를 입고 왕성하게 뛰던 마라톤 활동도 이제는 쉽게 도전하기가 힘든 나이가 됐습니다.

 

2014년 4월 16일, 그는 TV뉴스를 통해 세월호를 접했습니다. 17일은 그의 아들이 목포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유람선을 탈 예정이었던 아들을 그 바다에 보내기 하루 전, 맞닥뜨려버린 참사.

 

그날,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립니다. 아들같은 학생들이 살려달라는 아우성을 칠 때, 같은 학부모인 유족들이 인양을, 진상규명을 외칠 때, 그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칩니다. 우체국 앞 활동은 계속 이어갈 수 없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광주 마을촛불과 서울 등 전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활동을 더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도 밝힙니다.

 

“저는 지치지 않았어요. 계속 변함없이 더 왕성하게 활동할 겁니다. 갑작스러운 중단에 밥을 꾸준히 먹다가 안먹는 것처럼 허전하지만 그 시간만큼 다른 활동을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는 강렬합니다.”

 

 

광주시민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도가 가장 높던 시기, 하루 800개에 달하는 리본 나눔, 500여 1명의 서명이 이뤄질 만큼 시민들의 관심을 받았죠. 나누려는 리본 수량 감당이 안 돼서 전국의 제작소에서 리본을 공수해 와야 했을 정도입. 겨울이면 “고생한다”며 커피며 차며 핫팩까지 손에 쥐어주던 광주시민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입니다.

 

“광주시민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겪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에 대해 관심이 높아요. 아픔을 공유하는 거죠.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세월호 리본 아저씨를 충장로에선 매일 볼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쳤던 긴 시간만큼 그의 빈자리가 많은 시민들 마음속에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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