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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나”를 주장한 런베뮤 이효정은 왜 직원들을 짓밟았나?

[노멀 피플의 ‘색깔 있는 시선’] 6번째 칼럼입니다.

 

 

[평범한미디어 노멀 피플] 지난 7월16일 런던 베이글 뮤지엄 인천점의 숙소에서 해당 지점 주임으로 일하고 있던 26세 직원 故 정효원씨가 극심한 업무 과로로 인해 숨졌다. 고인은 키 180㎝에 몸무게 78kg의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기저질환은 없었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사망 직전 일주일 동안 약 80시간을 일했다. 사망 직전 2~12주 동안에도 주당 평균 58시간을 근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숫자만 봐도 심각한 수준의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두 법정 근로시간 상한인 주 52시간을 넘는 노동이다.

 

고인의 근로계약 내용도 문제로 거론된다. 월급은 325만원으로 책정돼 있었는데 기본급은 최저임금 수준이고 전체임금의 36%는 시간 외 근로수당이었다. 이 가운데 연장 근로수당만 월 65시간으로 미리 잡혀 있었는데 이를 역산하면 주당 14시간 이상 초과 근로를 해야 계산이 맞는다. 사실상 주 52시간 상한을 넘는 노동을 전제로 만들어진 계약서다. 이를 의식한 듯 계약서에는 “근기법 59조에 따라 1주 12시간을 초과해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제과점업은 근로기준법 59조가 허용하는 근로시간 특례업종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인은 회사에 업무를 이행하기 힘들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는 그러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고인은 14개월 동안 4개 지점을 옮겨다니며 근로계약 3~4개월짜리 단기 계약만 3차례 갱신했다. 런베뮤 구성원의 97%는 이와 같은 임시직 형태였고, 사측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 갱신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사 관련 여러 단톡방의 메시지를 제때 확인하지 못해 업무를 놓치면 시말서를 써야 했다. 1분이라도 지각했을 때도 마찬가지고 시재금 오류, 지시 불이행, 베이글 누락, 오결제, 발주 오류 등도 모두 시말서 사유가 되었다. 이러한 시말서 남발은 짧은 단기 계약과 맞물려 노동자들에게 상시적인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고인은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쉴 여유를 갖기 어려웠다. 사망 하루 전인 7월15일 그는 아침 8시58분에 출근하여 23시54분에 퇴근하며 지인에게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기본적인 휴게 시간과 식사조차 확보하기 어려울 만큼 업무 부담이 컸다는 의미다. 고인은 연인에게도 “백화점인데도 너무 덥다. 기운이 빠진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높은 노동강도를 토로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청년이 과중한 노동강도를 견디다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창업자의 ‘온전한 자기 자신’에 대한 강조

 

정씨의 죽음 이후 런베뮤가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회사의 필요에 맞게 행동하도록 강하게 압박해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러한 회사 방침이 더 큰 논란이 된 이유는 회사의 창업자가 다름 아닌 사회 모두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강변해온 이효정 브랜드 총괄 디렉터이기 때문이다. 여러 방송에 등장해서 그런 메시지를 피력했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최대한 효율적인 부품으로 만들기 위해 위법과 탈법을 자행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효정 디렉터는 자신의 서적 『료의 생각 없는 생각』 첫머리에서 우리 모두가 “다른 누가 되지 않고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썼다. 책 전반에 걸쳐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믿음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완벽하고도 유니크한 존재”로 규정하며 시간을 내어 “자기 이야기에 스스로 귀기울이기”를 요청한다. 그렇지만 수없이 많은 매체나 유행이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가 비슷해지지 않으면 무언가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 타인과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누군가가 정해준 시스템”에 따르지 말고 자기 자신이 “모든 기준과 선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이효정 디렉터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을 집요하게 설파했다.

 

그러나 이효정 디렉터가 그려내는 세계 속에서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나 고려가 쉽게 탈각된다. 책에서 이효정 디렉터는 런던 여행 중 “사소하고도 깊던 타인의 마음을 읽고 싶다”는 자신의 열망이 왜 커져만 가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쓴다. 그러나 그 사유는 끝까지 타인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곧바로 “그림을 그리거나, 낙서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다가 레시피를 구상하거나, 입을 옷을 고르고, 인테리어를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나”로 시선이 회수된다. 이어서 “무얼 향해 무얼 위해 매일을 가는 걸까”라며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만이 비춰진다. 이후 타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은 채 “무언가 주고 싶다는 마음과 무언가 갖고 싶다는 마음은 어쩌면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문장으로 끝난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싶다는 열망을 말하지만 그 열망은 끝내 타인의 조건이나 목소리를 따라가보지 않는다. 마지막에 또렷하게 남는 것은 나를 향한 관심과, 나를 향한 공허한 메시지 뿐이었다.

 

껍데기만 수입된 개인주의

 

사람들은 이러한 개인의 개성에 대한 강조를 자연스럽게 서구의 개인주의와 연결해 이해하곤 한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가족이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적 가치가 강조되어 왔고, 개인은 그 속에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는 존재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서구 문화는 계몽주의와 근대 자유주의 사상에 기대어 개인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보고 각 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권리를 중시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의 개인주의는,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일이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정당하다는 전제를 분명히 둔다. 다시 말해 개인의 개성은 타인을 해치지 않기 위한 노력과 제도적 합의 위에서만 정당성을 얻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을 통해 이런 서구적 개인주의의 조건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밀은 『자유론』에서 각 개인은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효정 디렉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밀은 그 개성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잘 가꾸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자유론』 전체를 읽어보면 사람에게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논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가 어떠한 때에 제한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위해가 되는 경우 분명히 제한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밀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시적인 법 규정 또는 암묵적인 이해에 따라 개인의 권리로 인정되어야만 하는 특정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도 적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해 『자유론』이라는 명저를 남긴 밀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런베뮤에 대한 규제와 처벌은 정당화될 수 있다. 정씨가 법률에 의해 보장받았어야 했던 적정한 강도의 노동을 할 권리를, 회사가 위법적인 것으로 판명된 근로계약과 압박적인 인력 운용을 통해 침해해버렸기 때문이다. 쪼개기 계약, 상시적인 시말서 작성 요구 등등은 건장한 청년의 건강을 해칠 만큼 장시간 노동을 하도록 만들었고 그 끝에서 청년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창업자 이효정 디렉터가 말해온 ‘온전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지향은, 타인의 권리를 함께 고려하지 않는 한 결국 이기주의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다. 타인 또한 그와 같은 지향을 실현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보장된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빠진 채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나르시시즘으로 기울기 쉽다.

 

우리 사회에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점점 더 퍼지고 있다. 그러나 타인 또한 온전한 개인으로서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자기 자신에 대한 담론은 자기 집착적인 이기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효정 디렉터의 나르시시즘적 자기 서사와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노동환경 사이의 간극은, 그런 담론이 어떻게 타인의 권리와 안전을 가리는 방식으로도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타인의 권리에 대한 고려를 배제한 개인주의는 공허한 나르시시즘이거나 자기 집착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는 통찰이,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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