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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내줄 수는 없더라도...

※ 지난 7월3일 19시반 전남광주특별시 남구 광덕사에서 진행된 하성용 신부의 강연 현장에 정회민 크루가 다녀왔습니다. 강연 주제는 <절에서 듣는 신부님 이야기>인데 구체적으로 ‘천주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정회민 크루가 현장 취재를 해온 것을 토대로 박효영 기자가 5부에 걸쳐 기획 시리즈 기사를 작성합니다. 이번 기사는 3부입니다.

 

[평범한미디어 →현장 취재: 정회민 크루 / 기사 작성: 박효영 기자] 천주교 신부라고 하면 흔히 고귀하고 거룩하며 진중하고 조용할 것 같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하성용 신부는 스스로를 그 틀에 가두지 않는다. 하 신부는 “신부 100명이 있다면 99명은 거룩하겠지만 100명 중 1명쯤은 나처럼 거룩함 대신 직관적이고 재기발랄한 사람도 있어야 세상이 재미있지 않겠느냐”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성진 스님은 타 종교인들과 함께 ‘만남 중창단’ 활동을 펼치며 방송과 현장을 누비는 ‘행동하는 사제’로 잘 알려져 있다. 말을 돌려하지 않는데 “하세요. 안 하면 본인 손해니까요”라며 곧바로 답을 던져주는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복잡하고 답답한 현대 사회에서 대중에게 명쾌한 울림을 선사해준다.

 

 

하 신부의 강연을 집중해서 듣던 한 참가자는 “퇴직 후 사회적 갈등이나 이슈를 보며 마음 다스리기가 너무 힘들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고 고민을 토로했다. 하 신부는 명쾌한 답을 해줬다. 세상은 나와 같은 사람보다 다른 사람이 훨씬 많으며 당장 한 집에 사는 배우자나 자식조차 나와 다르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와 다른 상대를 대할 때 억지로 꺾으려 하는 강압적인 방식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많을까? 나와 다른 사람이 많을까? 다른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면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될까? 나와 다른 사람을 부드러움으로 이겨내야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할 거라고 예상을 한다. 누군가 날 열받게 해서 내가 화가 났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뭘 느끼냐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내 의도대로 된 거니까. 만약에 열받게 했는데 이 사람이 전혀 열을 안 받아.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황한다. 왜냐면 이런 인간은 본 적이 없으니까. 이 인간이 왜 이러는 거지? 근데 처음에는 인정하기 싫으니까 계속 바보라고 험담을 한다. 근데 내가 보고 있는 그 사람이 바보가 아니라는 걸 그 사람이 알고 있다. 아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사람이 나보다 훌륭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바보구나라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바보가 아니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전혀 열받지 않고 흥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 오히려 상대가 당황할 수밖에 없다. 故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했는데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섣부른 설득이나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기다려주는 ‘대화와 평화의 시간’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하 신부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의 개념을 사회복지와 인간관계에 접목해 설명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출발선을 강요하는 냉정한 공정은 때로 사회적 약자에게 차별과 폭력이 될 수 있기에, 휠체어를 탄 이에게 50미터 앞에서 출발하도록 허용하는 배려야말로 진정한 정의라는 지적이다. 아울러 그가 정의한 평화는 단순히 나를 건드리는 사건이 없는 고요한 상태가 아니다. 세상에 온갖 풍파가 불어닥치고 누군가 나를 흔들려고 할지라도, 마음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온기를 나누는 성숙함 그 자체다.

 

예수님이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혀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고 웃어주었던 그 모습이 진짜 평화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기를 멈추지 않는 노력.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게 아니다. 내가 주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성경 말씀이 있다. 누가 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내줘라. 사실 이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은 아니다. 실제로 누군가 날 때리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인내나 복종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로 봤을 때 오른손 손등으로 타인의 오른쪽 뺨을 치는 행위는 하인이나 아랫사람에게 가하는 ‘모욕’이었다. 반대로 손바닥으로 치는 것은 ‘동등한 인격체간의 싸움’을 의미했다.따라서 모욕을 당했을 때 왼뺨을 돌려 내미는 행위는 굴종적으로 계속 맞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모욕적인 아랫사람이 아닌,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라”고 선언하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다.예수는 복수와 굴종이 아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하 신부는 현실적으로 왼뺨까지 내줄 수는 없더라도 현대적인 방식으로 치환해서 조언했다.

 

만약에 여기서 누가 내 오른뺨을 때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같이 때리면 안 된다. 그러면 쌍방 폭행이다. 맞은대로 돌려주면 안 된다.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 그런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된다. 상식적으로는 누구한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까지 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처럼 하는 것이 사회를 운영하고 사회를 유지하는 정상적인 방법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평화에 대한 취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 일도 없는 상태,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건드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에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나를 열받게 하는 사람에게 더 잘해주고 나를 웃게 해주는 사람에게는 그 웃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된다. 그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정의와 평화의 대안이다.

 

→4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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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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