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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거부하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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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2003년생 이유리씨는 남편을 따라 시골로 왔지만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것만 같다. 남편은 하루종일 농사 짓느라 바쁘고, 생후 15개월 아들과 집에 남겨진 유리씨는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지난 10일 방송된 MBN <고딩 엄빠3>에서는 어린 부부의 대화 단절 문제가 조명됐다. 단순히 대화가 좀 부족한 수준을 넘어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아내가 야반 도주를 감행하다 파국을 맞았다. 물론 해피엔딩으로 귀결됐고 남편의 무심함에도 나름의 배경이 있었다.

 

 

유리씨는 3살 연상 남편 박재욱씨와 함께 전북 진안군 부귀면에 살고 있다. 논과 밭, 산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깡촌 오브 깡촌이다. 상권이 1도 없다. 구멍가게 하나 없다. 진안읍이나 전주로 나가려면 자동차를 타고 30분 가량 이동해야 한다. 짜장면 배달이 안 될 정도다. 20대 초반의 여성이 아들 육아만 하며 살기에는 고립감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유리씨는 원래 전주 출신이다. 재욱씨는 농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내를 깡촌으로 데려와놓고 사실상 방치한 셈이다.

 

유리씨는 하루에도 수없이 “심심하다”고 혼잣말을 한다. 어린 아들 재율이에게 “언제 크니? 언제 말해? 엄마랑 말동무해줄 사람이 없네”라며 하소연을 하고 있다. 가정 주부가 집에 있으면 육아 및 집안일을 하느라 바쁘지 않을까 싶지만 유리씨는 필수적으로 꼭 해야 하는 것 외에는 손을 놓고 있다. 청소도 잘 안 하고 아기를 키우는 집의 위생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MC 박미선씨로부터 잔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유리씨는 사람들과의 소통, 최소한의 인간관계조차 맺을 수 없는 지금의 환경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일상이 오래 반복됐다.

 

게스트로 출연한 배우 고은아씨는 본인도 시골 출신이었다면서 “심지 않아도 자라는 쑥과 냉이 등을 캐고 그걸 오일장에 팔면서 재미를 찾아갔고 할 게 많다”고 했는데 유리씨는 그런 소일거리의 재미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사람과 만나 수다를 떨며 인간관계 안에서 본인의 존재감을 확인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아들에게 젖병을 물려놓고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봐도, TV를 켜도 무료함은 가시지 않았다. 크림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어서 배달앱을 켜보지만 진안까지 배달해줄 수 있는 업체는 한 곳도 없다. 유리씨는 갖고 있는 라면과 어린이용 치즈로 크림 파스타를 직접 만들어 봤지만 영 맛이 별로다. 참다 못 한 유리씨는 재율이를 데리고 재욱씨가 있는 밭으로 가서 무료함을 달래보려고 하지만 마음의 상처만 얻게 된다. 한창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재욱씨는 유리씨를 보자마자 “왜 왔어?”라고 내뱉었다. 유리씨는 그저 재욱씨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너무 반가워서 빨리 다가가려고 하지만 재욱씨는 아들에게만 반갑게 반응할 뿐이다. 맨발에 고무신을 신은 아들을 보며 유리씨에게 “왜 고무신 신겼냐”고 하자, 유리씨는 “나도 (슬리퍼에) 맨발이다!”며 자신에게도 관심을 보여달라고 눈치를 주지만 재욱씨는 “금방 들어갈테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닦달한다. 유리씨는 “나도 심심해서 나왔는데...”라고 재차 말했지만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집에서 초저녁까지 기다리자 재욱씨가 트랙터를 타고 귀가하는데 유리씨는 반가운 바음에 버선발로 나가 “오늘 파스타 만들었다가 망쳤는데 다시 만들어서 같이 먹자”면서 계속 쫑알쫑알 말을 쏟아냈다. 그러나 남편은 “아기 밥 먹였냐”는 말만 하고 아내한테는 무관심하다. 아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재욱씨는 2년차 농부다. 두릅, 고추, 수박, 옥수수, 고구마 등 관리하는 밭과 논만 11개다. 아버지 명의이지만 내년에 물려받을 예정이다. 재율이가 태어나기 전엔 목수, 철근, 퀵 서비스 등의 일을 하다가 아들이 태어난 뒤에 제일 자신있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농사 일을 배웠는데 재욱씨는 억대 농부가 되고 싶은 포부가 있다. 하지만 재욱씨는 그저 유리씨를 자신의 꿈이 실현될 농촌으로 데려왔을 뿐 꿈에 대해 공유하지 않았다. 함께 상상하고 계획을 나누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아들을 낳고 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의무감이 있어서 묵묵히 농사를 짓고 있지만 사실 물리적으로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재욱씨는 갖고 있는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잘게 나눠서 써야 할 때만 쓰고 있다. 농사 짓고, 아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만 에너지를 쓰고 유리씨와의 관계에는 전혀 에너지를 쓰지 않고 있다. 아내는 그저 주부로서 집안일과 육아를 알아서 해줄 존재이기 때문에 무관심해도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리씨는 어렸을 때부터 시시때때로 부부 싸움을 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던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집에서 풀어놓을 수가 없었다. 고성이 오가는 집에 올 때마다 지쳐만 갔다. 학교에서도 입시위주교육에 따른 주어진 과제만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속깊은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출했고 2년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2년만에 엄마를 찾아간 유리씨는 자퇴 선언을 했다. 유리씨는 “고등학교라도 나와야 한다”는 엄마의 만류에 “자퇴하는 걸 반대하면 평생 집에 안 들어갈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결국 유리씨는 엄마를 설득해서 자퇴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기간에 미팅으로 재욱씨를 만났고 만난지 하루만에 2대 2로 부산 여행까지 갔다. 원래 재욱씨는 유리씨에게 한없이 다정했고 유머러스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미루고 유리씨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할 정도로 속이 깊었고 그녀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항상 유리씨가 우선이었다. 재욱씨를 만난 유리씨의 어머니는 “(딸이 만났던 남자들은) 다 양아치였고 별로였다”면서 재욱씨를 아주 맘에 들어했다. 그 시절 유리씨는 재욱씨에 대해 “저희 엄마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정도로 완벽 그 자체였다”고 표현했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그어진 걸 보여줄 때만 해도 그런 재욱씨의 다정함과 자상함은 유지됐다. 그러나 재욱씨는 임신 8개월차부터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부른 유리씨를 홀로 두고 친구들을 만나느라 바빴다.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도 입실할 때만 잠깐 얼굴을 비치고 마지 못 해 전화 몇 분 해준 것이 전부였다. 일 때문에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자주 방문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살았다.

 

저희는 그냥 아예 대화가 안 된다. 임신하고부터 오빠의 태도가 변했다.

 

어느 순간 돌처럼 딱딱해져버린 남편은 농사 일을 나갈 때면 아무리 연락해도 ‘읽씹’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리씨는 자신의 요구를 정확하게 말했다. “대화를 좀 해보자”고 부탁해도 재욱씨는 매번 “다음에”라며 회피하기 바빴다. 그런 재욱씨에게 거듭해서 부탁을 하자 재욱씨는 화를 냈고 “몇 번을 말해! 나중에 하자고”라는 태도를 보이고야 말았다.

 

(제작진들이 집에 많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사람이 많아서 너무 좋다. 너무 심심하다. TV 틀어도 재미없고 스마트폰을 봐도 재미없고 하루 반나절을 멍만 때리고 있어서 (고딩엄빠3에) 신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욱씨가 농사 일을 마치고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일반적으로 사전에 말도 없이 남편이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 아내는 화를 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리씨는 오랜만에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재욱씨는 친구 2명과 아내가 모인 밥상에서 대놓고 자기 앞담화가 벌어져도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유리씨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함께 남편 욕을 해도 무관심하다. 친구들도 그런 재욱씨를 나무란다. 아내가 심심해서 밭에 왔으면 “좀 알려주고 같이 해볼래?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하지만 재욱씨는 “농사라는 게 상처가 많이 나고 기계 만지면 기름 묻고 이런 걸 와이프가 한다는 게 싫었다”면서 오히려 유리씨를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 강변했다.

 

오늘 (친구들) 오는 것도 얘기 안 했다며? (내가 표현이 너무 서툴러서) 그거 핑계야.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 말만 1년 가까이 하고 있다. 네가 문제점을 안다고 하는데 바뀌지 않아. 네가 유리한테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곰곰이 생각해봐.

 

 

VCR을 보던 MC들이 아들이 먼저냐 와이프가 먼저냐고 물었을 때 재욱씨는 살짝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아들이 먼저”라고 답하는 사람이다.

 

꿀맛 같은 수다 타임이 계속되던 와중 재율이가 졸렸는지 갑자기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유리씨는 결국 재율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와서 재우기 바빴고 이내 술자리는 끝났다. 사람과의 대화 자체가 그리웠던 유리씨는 거실 쇼파에서 재욱씨와 마주 앉았다.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묻는 유리씨에게 재욱씨는 “싫어. 내일 이야기해”라고 또 회피했다. 유리씨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그놈의 내일 내일 내일 하지 말고.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잖아”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재욱씨는 유리씨를 두고 그대로 안방으로 가버렸다.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무작정 피한다. 모든 대화를 일절 차단해버린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신청한 계기다.

 

뭔가 큰 결심을 한 것 같은 유리씨는 야밤에 캐리어에 짐을 싸서 나가려고 한다. 소음을 듣고 거실로 나온 재욱씨는 “야밤에 뭐 하냐?”고 따져묻고 살기에 찬 눈빛을 보였다. 유리씨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이 집에 내가 필요없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짐을 쌌다”고 말했는데 재욱씨에게도 “너랑 말이 안 통하니까 짐 싼다”고 밝혔다. 재욱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충격을 받았는지 슬슬 화를 내기 시작한다.

 

왜 이럴 때만 관심을 주냐? 너 애초에 나한테 관심조차 없었잖아. 그러니까 관심 끄고 살아. 언제부터 나한테 관심 있다고? 내가 집을 나가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인데?

 

재욱씨는 왜 그러냐고 살갑게 말하지 못 한다. 그저 “이렇게 짐부터 싸고 나가려 하지 말고.. 너가 나한테 진지하게 얘기해준 적 있어? (짐) 풀어!”라고 다그치기만 한다.

 

너 연애할 때랑 완전 변한 거 알아? 엄청 변했어.

 

유리씨는 제작진에게 “오빠가, 내가 임신하고 180도 바뀌어버렸다. 임신하기 전에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 마냥 애틋하고 풋풋하고 그랬는데 임신하고나니까 여자가 아닌 아줌마가 되어 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캐리어를 뒤집고 발길질 하고 가버리는 재욱씨의 장면을 끝으로 스튜디오가 비춰졌는데 고정 패널 이인철 변호사는 “이혼하는 5단계”가 있다면서 ①대화가 없고 ②섹스리스가 되고 ③각방을 쓰고 ④별거까지 하고 ⑤그렇게 이혼을 한다고 정리했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지금 두 사람이 “벌써 이혼 직전이다. 같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평가했다.

 

 

다음날 아침 유리씨는 이미 집을 나가고 없고 재율이가 재욱씨를 깨웠다. 유리씨는 친정집에 가서 먹고 싶었던 크림 파스타와 떡볶이를 먹고 있다. 그런데 재욱씨가 장모님의 연락을 받고 아들과 함께 유리씨를 금방 찾아왔다. 부부간의 진솔한 대화가 처음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유리씨: 장난치지 말고 말해.

 

재욱씨: 그렇게 가버리면 나랑 재율이랑 어떻게 하라고.

 

유리씨: 그러면 내 이야기를 피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이야기를 할 때 존중하고 조금이라도 들어줬어야지. 어차피 이참에 집 나온 김에 나 여기서 살 거야. 재율이 데리고 가든가. 여기서 엄마와 동생이랑 수다 떨 수 있는데 내가 혼자 집으로 들어가면 오빠 나한테 말도 안 걸잖아.

 

재욱씨: 나도 너한테 안 잘 해주고 싶어서 안 잘 해준 게 아니라고. 표현이 서툰데 나보고 뭐 어떻게 하라고.

 

유리씨: 노력을 해야지.

 

재욱씨: 노력을 하는 데도 안 바뀌니까.

 

유리씨: 오빠의 노력은 거기까지야. 사람 바뀔 수 있어.

 

재욱씨: 그니까 걱정돼서 내가 널 찾으러 왔잖아. 네가 걱정되고 보고싶고 하니까 찾으러 온 것 아니야. 안 그래?

 

유리씨: 나 못 믿겠어. 오빠는 말로만 그러니까 못 믿어. 내가 임신하고 나서 오빠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처음에 권태기인가? 날 진짜 사랑하지 않는 건가? 내가 질린 건가? 이런 생각까지 별 생각이 다 들었어.

 

재욱씨: (웃으며)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너도 어린 나이에 애기 엄마 됐고, 나도 어린 나이에 애기 아빠가 됐고. 뭐가 뭔지를 모르겠어... (무심한 눈빛 속 진솔하게 말하는 모습으로) 내 행동은 너한테 무뚝뚝하게 하는데 내 머릿 속에서 생각하는 마음은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나도 왜 너한테 무뚝뚝해진지 모르겠어.

 

유리씨: 내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거는 오빠가 조금 부드럽게 대해주고, 자기 전에 대화라도 조금이라도 해주고, 오늘 뭐 먹었는데? 이런 걸 물어봐주는 게 나는 그런 걸 관심이라고 느껴.

 

 

 

제작진 인터뷰에서 재욱씨는 “나한테 애기가 생겼다는 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고 너무 기뻤고 진짜 유리가 너무 고마웠다. 유리가 여자친구일 때는 장난도 치고 친숙하게 다 했었는데...”라며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다 보니까 함부로 다가갈 수가 없어서 그것 때문에 내가 조금 더 무뚝뚝해진 것 같다”고 스스로를 진단했다. 재욱씨는 아직 철없이 살고 싶은 젊은 20대 초반의 청년인데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에 돈 버는 일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다보니 감정이 무뎌졌다.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농업에 종사하며 성과를 내고 싶다는 목표까지 생겼으니 더 심해졌다.

 

화면 밖에서도 해피엔딩이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화해했다. 부부는 재율이와 함께 벚꽃이 핀 마이산으로 나들이를 갔다.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데이트하는 것이 처음일 정도로 두 사람은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았고 무거운 현실의 삶에 짓눌려왔다. 재욱씨는 유리씨와 깍지를 끼고 약속했다.

 

앞으로 너한테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라도 전화를 해줘야겠더라. 이제 네 마음을 알 것 같다. 미안하고. 앞으론 대화 잘 해줄게.

 

TV 속 해피엔딩이 일상에서도 이어지길 바란다. 재욱씨가 계속 노력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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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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