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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올팍의 크리스찬 “돈으로 치장된 화려함”만 쫓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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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정지우 변호사] Zior Park의 <Christian>이 유튜브에서 1000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며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다. 뮤직비디오의 흡입력 있는 구성이나 리듬, 특이한 목소리, 흥미진진한 박자감이나 약간의 섬뜩함 등이 결합된 매력이 대단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가 가진 함의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가사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위선과 자책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돈이 가져다 주는 화려한 향락을 맛보면서, 돈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믿는 한 셀럽의 삶이 가사 속에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일요일이면 교회를 간다.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깝고, 부자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성경의 구절을 여전히 떨쳐내지는 못하지만, 돈과 성공이 열어버린 향락의 세계에 취해버린 채로, 어쩌지 못하다 결국 구토하면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한다는 게 이 가사의 골자처럼 보인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단순히 기독교인의 위선과 같은 문제는 결코 아닐 듯하다. 애초에 그렇게 지엽적인 문제였으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와 가사에 끌렸을 리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크리스쳔이건 아니건,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 현대 사회의 그 무언가를 꿰뚫고 있다. 돈, 명품, 파티, 유명세, 그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향락적인 삶을 모두가 부러워하고, 꿈꾸고, 동경하면서 그 '화려한 이미지'에 도달하길 갈망하는 이 시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전례 없을 정도로 단 하나의 '화려한 삶이라는 이미지'를 향해 소용돌이처럼 빨려드는 시대에 종착지처럼 도착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가치, 자기만의 꿈을 좇는 것,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 내면의 가치, 이웃과 만들어나가는 공동체, 국가나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 등 과거를 지탱하던 그 무엇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우리 사회에 남은 건, 그 대신 오로지 '돈으로 처바른 화려한 삶'에 대한 지향, 동경, 질투, 시기 하나 뿐이다.

 

 

지올 팍의 '크리스쳔'에서는 화려하게 춤추고 파티하며 놀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구토를 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어린 아이가 이 어른들을 향해 구토를 한다. 이 때의 구토란, 지올 팍 본인을 향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역겹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조차 감당할 수 없어진 이 향락 그 자체에 대한 어떤 과잉, 초과 상태, 더 이상 견디지 못 하는 게워냄에 가까울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 기준을 잃어버리고 남은 건 향략 밖에 없는 삶에서 오는 '견딜 수 없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삶의 가치 기준이랄 것을 배운다. 착하고 정의로운 만화 주인공들을 보며 그들을 닮고 싶어 하기도 하고, 선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커나가면서 우리는 어릴 적 동경하며 배웠던 가치 기준이랄 것들을 점점 잃어버리고, 오로지 돈과 화려한 삶 밖에 모르는 어른이 되어간다. 텅 비어버린 마음에는 타인들의 욕망과 화려한 이미지들만이 들어찬다. 역겨움은, 구토감은 스스로의 가치 중심 없이 흔들리는 삶에서 오는 어지러움에서 비롯된다.

 

지올 팍의 <크리스쳔>은 이러한 가치 상실의 시대를 겨냥했고, 사람들은 그야말로 꿰뚫렸다. 우리는 공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 삶의 의미는 그냥 주어져 있는 것이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모두가 각자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치는 종교적, 윤리적, 사회적 가치이든 불문하고, '돈으로 치장된 화려함' 앞에서 실체 없이 무력하게 흩어진다. 그 어떤 가치도, 최후의 종교 마저도, 이제 더 이상 외제차의 하차감, 비싼 동네에 사는 자부심, 명품을 걸친 즐거움, 화려한 파티에서의 향락(을 전시하는 이미지)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이 노래는 가치가 사형 선고를 당한 시대의 쇳소리 같은 중얼거림으로 우리 마음을 긁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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