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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선로에 드러누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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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지난 2월9일 19시8분쯤 천안·아산역을 지나 광명역으로 향하고 있던 KTX 산천 열차에 40대 남성 A씨가 치여 숨졌다. 정확하게는 지제역 인근 고가 선로에서 비극이 벌어졌는데 해당 지점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곳으로서 A씨가 사전에 자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펜스를 넘고 접근해서 미리 드러누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A씨가 자살을 감행하기 직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던 부분도 확인됐다. 구조대원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A씨가 숨을 거둔 이후였다. A씨는 코레일 직원이 아니었다. 아마도 평소 평택역이나 지제역을 자주 이용하는 인근 주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A씨의 자살행위로 KTX와 SRT 등 열차 65대의 운행이 2시간 가량 지연됐는데 이날 21시40분쯤 상하행 열차의 운행이 정상적으로 재개됐다.

 

 

이처럼 고속철도 선로에서 자살하는 사례는 매년 10건 가량 발생하고 있다. 임상심리사로 근무하고 있는 정의당 정채연 정신건강위원장은 평범한미디어에 자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 원인을 섣불리 추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조언해준 바 있다. 다만 정 위원장은 자살을 줄이기 위한 한국사회의 복지정책과 구조적인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장 보건복지부 산하 건강정책국 ‘자살예방정책과’의 예산과 인력 부족 문제와, 전국 지자체 산하에 있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인력 부족 문제 등을 해소해야 한다.

 

정 위원장에 따르면 통상 자살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에게 반드시 시그널을 보내고 △죽고싶다는 마음 →수단 탐색 →자살 결심 등의 과정을 연속적으로 거치기 때문에 “자살 사고(thought)”의 흔적을 빨리 발견하면 “이후에 자살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흔히 ‘투신’이나 ‘목 매는 것’ 나아가 ‘번개탄’ 등의 자살 방법들이 가장 일반적인데 열차 선로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별도로 연구해서 정리해놓은 결과물이 전무하다. 그러므로 구조적이며 근본적인 자살 예방 연구와는 별개로 가장 시급한 것은 견물생심 자살을 물리적으로 막는 조치들을 점검하는 것이다. 자살하기로 맘먹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살을 감행하겠지만 적어도 자살하기 어려운 물리적 환경들로 인해 포기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 위원장은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물리적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구조를 개선해야 된다에만 몰두하면 어쨌든 그 구조가 바뀌기 전까지는 변화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2009년 이전까지 지하철 선로에 뛰어드는 자살 문제가 정말 심각했다. 그러나 2009년 이후로 수도권 거의 모든 지하철역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면서 완벽하게 해결됐다. 이제 남은 것은 고속철도 선로다. 고속철도 기차역에는 왜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지 않고 있는 걸까? 사실 문제의식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하철과 달리 KTX, SRT, 새마을호, 무궁화호, 화물열차 등이 다녀야 하는 고속철도 선로의 역사에는 좌우로 계폐되는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열차의 길이가 제각각이라서 문의 위치에 맞는 정차 지점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년 한국교통연구원이 국내 최초로 대구지하철 2호선 문양역에 ‘로프형’ 스크린도어를 설치해서 시범운영을 해봤다. 로프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상하 개폐 방식이라 열차 종류별 문의 위치가 달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일본과 유럽 등 외국의 사례들도 존재한다. 시범운영의 결과도 꽤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1년간의 시범운영을 마친 이후 대구교통공사가 인수해서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고의든 실수든 선로에 사람이 뛰어드는 사고는 전무했다. 국토교통부도 2017년 2월 ‘스크린도어 안전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충남 논산역에 로프형을 추가 설치하고 1년간 시험가동을 했다가 철거한 뒤 교통연구원에 연구를 맡겼는데 아직까지도 함흥차사다.

 

사실 2017년 상반기까진 분위기가 좋았다. 교통연구원이 여러 기관 및 민간업체들과 함께 ‘국토교통 R&D 과제’의 일환으로 상하형 스크린도어(VPSD Vertical PSD)를 개발했고, 국토부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전국 기차역 690곳에 VPSD를 설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VPSD는 국수처럼 팽팽한 얇은 로프가 10㎝ 간격으로 30여개 정도 위치해 있다가 열차가 도착하면 위로 올라가서 승객들이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도록 해준다. VPSD는 기존의 좌우개폐형 스크린도어에 비해 원가가 저렴한데 이미 국책연구기관 위주로 개발되던 기술력은 민간업체들로 이전 절차가 완료됐다. 현재 교통솔루션 업체 ‘에스트래픽’과 주식회사 ‘우리 기술’은 컨소시엄을 꾸려 VPSD를 해외에 수출하는 데 여념이 없다. 2020년 7월부터 2021년 2월까지 프랑스(방브스 말라코프역)에 VPSD를 설치해서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고, 프랑스국영철도(SNCF)와의 협력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런데 국토부는 2018년 들어 “논산역에 연구개발사업으로 시범 설치한 것일 뿐”이라며 “KTX 정차역에 스크린도어 사업 예산이 잡힌 게 없다. 고속철도는 구간이 워낙 길다. 비용이 한 두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태도가 돌변했다. 연 평균 10여명이 고속철도 선로에서 자살하는 정도로는 여러 애로사항이 있기 때문에 VPSD를 전국 기차역으로 확대 설치할 수 없다는 속내로 해석된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고속철도 기차역은 중부내륙선 KTX 5개역, SRT 동탄역 등 전국 6곳에 불과하다. 6곳은 전부 고속철도만 다니는 고상홈 기차역이다. 고속열차가 다니는 기차역은 종류에 따라 고상홈과 저상홈이 있는데, 쉽게 말해 승객이 땅에 딛고 있는 지면이 열차 높이보다 낮아서 발판을 밟고 탑승하는 것이 저상홈이다. 통상 고속열차 기차역은 저상홈인데, 해당 6곳은 일반 지하철역처럼 고상홈이라서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게 용이하다.

 

그래도 VPSD 원가가 싼편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고속철도의 구간이 길더라도 전국의 기차역으로 확대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국토부와 국가철도공단이 VPSD에 손사레를 치고 있는 근거들은 아래와 같다.

 

①고상홈 지하철역과 달리 저상홈 기차역은 승객이 실수로 선로에 떨어지더라도 금방 플랫폼 위로 올라올 수 있다.

②지하철역과 달리 예약 지정석에 따라 탑승하는 고속철도 기차역에는 인파가 급격히 몰릴 일이 거의 없어서 긴급한 사건사고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③선로 바닥과 승강장의 높이가 1.1미터 가량 되는 저상홈(지하철역)에 대해서는 스크린도어 설치가 법적으로 의무화돼 있지만 일반적인 저상홈 기차역은 그렇지 않다.

④좌우개폐형 스크린도어 설치 비용이 보통 역 한 곳당 12억원 정도 하는데, 로프형 VPSD는 10억원 미만이라서 좀 저렴하긴 하지만 전국 684곳에 전부 설치하려면 대략 70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⑤시속 300㎞로 달리는 고속열차가 무정차로 기차역을 통과하기도 하는데 VPSD를 설치하기에 기술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휠체어 승객의 탑승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점 등 여전히 해결하지 못 한 부분들이 있다.

 

 

비용 문제는 연 매출 5~6조원을 벌어들이며 부채가 좀 있으나 자산 총액 25조원을 보유하고 있는 코레일이 좀 더 신경을 쓰면 극복하지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코레일이 국토부와 국회에 적극적으로 요구해서 예산을 확보할 수도 있다. 특히 KTX가 시속 300㎞로 달린다고 해도 로프형이나 난간형 등 VPSD의 기술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KTX이나 SRT를 타려고 플랫폼에 서있을 때 고속으로 지나가는 열차로 인해 살짝 휘청이거나 머리가 휘날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정말 발을 헛디뎌 선로에 빠질 수도 있고, 술에 취한 사람이 선로에 추락할 수도 있다. A씨처럼 자살하기 위해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런데 VPSD가 안전하게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면 이런 불상사는 애초에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관련해서 평범한미디어는 추후 교통연구원, 코레일, 국토부 나아가 민간업체 등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후속 보도를 이어갈 계획이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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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영

평범한미디어를 설립한 박효영 기자입니다. 유명한 사람들과 권력자들만 뉴스에 나오는 기성 언론의 질서를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취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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