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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다이 인생⑥] 혼자 장애인자립센터 운영하는 성준씨 “그 손을 뿌리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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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 박성준씨는 1977년생으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당사자이자 인권운동가다. 성준씨는 몸이 불편하지만 개의치 않고 오늘도 장애인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독고다이 인생 여섯 번째 주인공은 성준씨다. 어렴풋이 페이스북을 통해 어떤 활동을 하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꼭 만나보고 싶었다.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3월8일 15시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모 카페에서 성준씨를 만났다.

 

 

성준씨는 현재 다소니자립생활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다. 

 

주로 장애인 인권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자립생활센터’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자립을 지원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밖에도 장애인 권익에 대한 논의와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어렵고 힘든 점은 무엇일끼? 

 

사실 자립센터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정식적으로 법에서 이야기하는 자립생활센터의 형태를 갖추진 못 했다. 정부 보조금 신청 요건이 되지 않아 지원도 받지 못 했다. 후원금이 한 달에 어느정도 들어오긴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거의 자비를 들여가며 운영한다. 이외에도 혼자 운영하면서 겪는 어려움도 있다.

 

혼자 후원을 받아서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성준씨는 센터 운영을 멈출 수가 없다. 지속적으로 장애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절을 못 한다. 내가 그 손을 잡지 않았을 때 다른 분들이 그 손을 잡아주면 다행이지만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나에게 왔다면 나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없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거절을 할 수 없다.

 

 

성준씨의 원동력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성준씨는 “사명감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한 것 같다. 나도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겸손한 태도로 말을 했다.

 

독고다이 인터뷰에서는 나만의 전성기를 물어본다. 장애인 인권 운동에 평생 힘써온 성준씨는 자신의 전성기가 언제라고 생각할까? 성준씨는 대학생 시절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신체적으로도 가장 젊었고 활기가 넘쳤을 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관련 활동을 하며 상도 많이 받아서 굉장히 명예로운 시기였다.

 

전성기는 대학생 때라는 생각이 든다. 거의 약 20~25년 전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도 특례입학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들어간 편이다. 그리고 그때도 활발히 활동하여 학교 내에서 상도 받았고 2000년에는 서울시에서 청년상도 받았다. 그때가 제일 내가 많이 알려졌던 시기다. 사실 내 본래 전공은 문예 창작이라 대학 시절에 나는 글쓰는 직업을 가질 줄 알았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어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 자원봉사를 하면서 인정을 많이 받았다. 아무래도 장애인이다 보니 눈에 띄었던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면 때문에 더 과분하게 여러 군데서 인정을 받았다.

 

 

최근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투쟁이 주목을 받고 있다. 성준씨와 한창 인터뷰를 하는 시점에는 아직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페이스북에 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뜨거운감자였다. 성준씨에게 장애인 이동권 문제 이외에 기타 장애인 인권 분야에서 꼭 주목을 받아야 하는 이슈들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성준씨는 ‘자립’을 강조했다.

 

장애인 운동이라고 요즘 최대 이슈인 버스, 지하철 이용 관련 이동권 시위를 많이 떠올릴 것이다. 소위 말해서 투쟁적인 노선으로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장애인 운동이라고 하면 다른 것들과 다르게 장애인 전 생애, 전 영역에 걸쳐서 살펴봐야 한다. 따라서 ‘어느 한 영역, 어느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렇게 볼 수 없다. 결국, 총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다만 적어도 부모님이나 돌봐주는 사람이 돌아가시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옆에 없을 때 스스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게 해야 한다는 큰 줄기의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

 

성준씨가 생각하는 장애인 운동의 지향점이 곧 자립이었다. 자립이 근본적인 방향성이다. 대표적으로 장애인 취업만 봐도 자립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장애인도 취업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국가에서 주는 대로 받고 살고 국가에서 원하는 대로만 살라는 법은 없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경제적인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주는 기초수급비 외에도 다른 수익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1인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만큼 외로움이나 고독감, 쓸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거의 항상 그런 감정을 느끼는데 왜냐면 일단 일을 추진할 때 상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성준씨는 다른 단체 동지들과 대화하고 교류하면서 이러한 감정을 극복해갔다고 한다.

 

내가 사는 은평구의 특징이기도 한데 ‘장애인 단체 연대체’가 존재한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연대체가 있어서 거기 소속된 분들과 자주 만나며 대화를 한다. 우리들끼리는 연대가 되어 있는 편이다 보니 이분들이 내게 많은 도움을 준다. 나보다 먼저 장애인 관련 운동을 시작한 분들도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다.

 

 

성준씨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외로운 감정을 날려버리기도 하지만 취미 생활로도 쓸쓸한 감정을 해소한다.

 

텍스트를 정말 좋아한다. SNS를 하기도 하고 독서, 신문 읽기를 활발히 한다. 정보를 습득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

 

이렇게 열심히 장애인 인권 운동을 이어가는 성준씨의 궁극적인 꿈이나 목표 같은 것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인생이 딱히 목표대로 되었던 적이 없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흘러가는대로 살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생이 정해놓은 목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앞서 말했다시피 글도 좀 썼었고 처음에 문예 창작을 전공했기 때문에 막연히 작가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지금까지 왔다. 그러다가 또 우연한 기회에 좋은 분들을 만나 정당 활동도 했다. 다양한 일들을 하다 보니까 5~6년 뒤에는 다른 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우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일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주온 아이들은 부모 나라의 언어를 잘 모른다. 쉽게 말해 모국어를 학습할 기회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동화책 같은 것을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2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한국어와 모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앞서 언급했던 정당 이야기를 해볼 차례다. 성준씨는 한 때 원외정당 미래당에 몸담은 적이 있다. 지금은 탈당한 상태인데 왜 탈당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먼저 성준씨는 미래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미래당 탈당은 사실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원래 민주당 대의원이었다. 내가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알게 된 사람이 민주당에 있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민주당 기준으로 청년의 기준이 만 45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내가 만 40세였는데 45세가 청년 정책을 만드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20세 청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탈당했다. 그러고 나서 찾았던 곳이 당시 제일 젊었던 그리고 2~30대의 젊은 사람들에게 공동대표를 주었던 곳이 우리미래(미래당의 과거 당명)였다.

 

이 타이밍에서 성준씨는 가슴 아픈 세월호 참사를 거론했다.

 

청년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 계기는 세월호 사건 때문이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던 친구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정말 ‘가만히 있으라’ 이 말만 믿다가 비극이 발생했다. 이런 못난 어른들을 지적했던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며 ‘나는 나이가 어느 정도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정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이 16세 투표권 20세 참정권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같이 했던 곳이 미래당이었다. 그래서 입당했다. 미래당이 청년 중심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청년 중심의 정당이었던 만큼 만 45세가 되면 미래당을 탈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오래전의 계획대로 그렇게 미래당에서 나왔다. 딱히 트러블이 있거나 뜻이 맞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더 이상 청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고민없이 탈당을 감행했다. 그러나 성준씨는 자신이 생각한 시간보다 1년 정도 더 빨리 탈당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망하고 미래당 오태양 대표가 ‘박원순 정신을 계승하겠다’ 이런 발언을 했다. 박 시장이 성추행 가해자일지도 모르는데 무슨 노이즈 마케팅도 아니고 그런 발언은 정말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정의당도 비슷한 불미스러운 일로 서울시장 선거에 불출마했다. 나는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박 시장이 가해자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피해 여부를 다툴 수 있는 여지마저 박 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스스로 막아 버렸다. 나도 박 시장이 사회운동계에 남긴 족적과 업적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분명 훌륭한 분이었다. 그래도 나름 경력도 오래되고 당대표라는 사람이 문제의 발언을 한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성준씨는 오 대표의 박원순 정신 워딩으로 인해 탈당을 감행했을 정도로 더불어민주당에 상당히 비판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준씨는 페북을 통해 비판적 지지를 이유로 이재명 전 후보에게 표를 줬다(사전투표)고 밝혔다. 진보적 소수정당 당원들은 누구나 '차악 투표'의 부작용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준씨는 결국 차악 투표를 하고 말았다. 거대 양당의 기득권적 질서에 기여해버린 것은 아닐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성준씨는 그 점에서 쿨하게 인정했다.

 

차악 투표가 맞다. 거대 양당의 기득권적 질서에 기여해버렸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이런 선택을 한 건지 설명하자면 윤석열 후보를 명확하게 반대해야 할 이유가 너무 컸다. 두 번째 토론을 보기 전에는 나도 계속 제3지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 후보에게 표를 줘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큰 이유는 윤 후보가 토론하는 태도를 보았을 때 거의 토론의 형태가 아니라 추궁의 형태였다. 나는 윗사람이 추궁하면 그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또 다른 독재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검찰 공화국’이 될 것 같았다.

 

이재명이라는 대선 주자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실질적으로 윤 후보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후보 밖에 없다고 본 유권자들은 전국에 대략 1000만명 이상일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성준씨의 정치관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그 직후 동석했던 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와 함께 제3지대를 중심으로 여러 대화를 더 나눴다. 성준씨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대선이 끝난지 한참 지났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준석발 장애인 이동권 이슈에 불이 붙었다. 당연히 성준씨의 비판적 메시지가 나올 것이라고 봤다. 바로 위에 성준씨의 페북글을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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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안녕하세요. 평범한미디어 윤동욱 기자입니다. 권력을 바라보는 냉철함과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겠습니다. 더불어 일상 속 불편함을 탐구하는 자세도 놓지치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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